[임계재의 음악놀이터]'사랑의 슬픔' 들은 여섯 살 짜리의 음악평!

22년이 넘도록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열리는 종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의 ‘수요 집회’ 가운데 8월 15일이 낀 수요일에는 특히 많은 사람이 모입니다.

올해 집회에도 삼천 여명이나 참가자가 짤짤 볶아대는 더위에도 일본의 만행에 팔을 휘둘렀습니다. 올해는 특히 새로 집권한 일본 아베정권의 미친 사상에 분노한 열기가 뜨거운 아스팔트 열기에 주눅 들지 않고 일본대사관을 향해 한 마음으로 목소리를 모았습니다.

이런 날 제게는 대목입니다. 한동안은 ‘전쟁과 여성 인권박물관’ 건립기금을 위해 모금함을 들었고, 몇 년 전부터는 평화비(소녀상 아시지요? 주먹 거머쥔 어린 소녀 어깨 위에 새 한 마리, 그리고 바닥에는 쪽진 노파의 가슴 위로 나비가 앉아있는 ‘아픈 동상’말입니다.) 모금함 치켜들고 그 많은 인파를 헤집고 다니지요.

어린 학생들이 용돈 쪼개 기부하면 가슴에서 우러나는 감사 인사를 꼭 전합니다.

“여기 참석한 것만으로도 고맙고 대견한데... 학생들처럼 고운 평화비, 여성과 어린이가 고통 받는 세계 곳곳에 아름답게 설 거예요, 잘 전할 게요, 정말 고마워요.”

올부터는 레퍼토리 바꾸었습니다.

지금까지는 “현금 없으면 신용카드와 비밀번호 줘요, 적당한 액수 내가 찾아서 모금함에 넣을 게요.” 이랬는데 “오늘 모금함에 마음 못 보탠 사람들은 개학 전에 다시 와요, 이번에는 ‘외상’줄게, 다음에 갚아요. 꼭 입니다~.”

까르르, 가랑잎 굴러가도 웃는 나이의 소녀들이 넘어갑니다. 그러면 한 마디 덧붙입니다.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이런 딸 낳으신 것 참 부럽다’고 전해요. 아울러 설거지도 하고요.”

이렇게 한 시간 좀 넘게 군중 사이 누비면 체중이 빠집니다. 목도 쉬고요.
그렇게 모금함 두 개를 채웠습니다. 언제라도 마찬가지지만 많이 고마운 뜨거움이었습니다.

“더우시지요? 고생하시네요.”

인사 건네시는 참석자들.

“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데요.”

정말 더웠습니다만 못 느꼈습니다. 그냥 땀 흘릴 따름이지요.
모금 중간 중간 함께 참석한 중국인 변호사까지 챙기다 공항버스 태워 보낸 후 반쯤 넋 나간 채 기다시피 집에 왔습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구십 가까이 되신 어르신이 그러시더군요.

“지금까지 이렇게 더운 여름은 없었다.”

대꾸도 어려운 몸과 달리 아주 오래 전에 들은 말이 떠올랐습니다. 어떤 여섯 살배기 계집아이가 그랬답니다.

“내 평생, 이렇게 더운 날은 처음 보네.”

‘어이구, 그러셔? 여섯 살 평생 살아내느라 얼마나 고단하셨을까나?’

그 나이 때 아이들, 어휘가 갑자기 늘고 발음도 제대로 잡히면서 엉뚱하고 깜찍한 말 뭉텅뭉텅 쏟아냅니다. 대개는 어른들, 특히 할머니에게서 들은 말일 테지만 그저 이뻐 죽겠어요. 쳐다보기도 아까운 나이 아닌가요.

너무 지쳐 기운 떨어지고 시장기는 돌지만 어쩔 줄 모르고 헤매던 중에 또 다른 여섯 살짜리 사내아이의 말이 하나 더 생각납니다.

“이 노래는 외로워.”
 

아빠의 일터에서 늘 귀 열어두고 자주 듣던 음악 가운데 ‘바이올린의 신’이라는 찬사를 받아 마땅한 프리츠 크라이슬러가 작곡한 <사랑의 슬픔>을 듣고 그랬다는군요.

‘하이고, 이 녀석은 어쩌자고 그리도 기막힌 표현을 한담.’

아주 어려서부터 몹시 ‘서정적’이었던 녀석이 꼭 저다운 말로 음악 평을 했답니다.
여섯 살짜리가 실연당했을 리는 결코 없을 텐데, 아픈 마음을 어떻게 알아챘을까요?
전해들은 말이지만 어찌나 신통하던지, 두고두고 그 결 고운 심성 칭찬하고 싶었습니다.

수다쟁이인 저는 이 꼬마의 말을 여러 사람에게 퍼뜨렸습니다. ‘정신 번쩍 드는’ 이 아이의 느낌을 어떻게 몇 사람만 듣고 접을 수 있겠습니까. 어린아이의 엉뚱한 표현으로 그 곡의 핵심을 짚어내는 기막힌 감성을 말입니다.

꼬마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 모두 저와 똑같은 마음으로 눈을 가늘게 뜨며 이구동성입니다, ‘아구구, 이뻐라!, 기막힌 음악 평론가 났네.’

어느 영화에서 살인범을 쫓는 형사가 게걸스럽게 자장면을 먹으며 라디오에서 들리는 음악을 듣다 한 마디 던집니다. ‘난 이 노래, 노래가 좋아!’라고요. 감독이 그러더군요. 형사의 무식함을 드러내려고 일부러 ‘음악’이라고 하지 않고 ‘노래’라고 표현하게 했다고요. 

우리 귀에 들리는 것은 노래입니다. 가사, 없으면 어떻습니까, 들어서 마음 순해지면 그게 ‘노래’겠지요.
좋은 이야기라면 부지런히 퍼 나르는 저의 수다, 앞으로도 계속 이어가렵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바이올린 기교를 익혔다’는 파가니니의 재림이라는 소동이 일어날 만큼 연주 실력이 워낙 출중한 크라이슬러. 아름다운 소품이어서 친숙하니 그의 음악이 늘 우리 곁에 있는 거지요.

이름난 바이올린 연주자가 자기 여동생의 결혼식에서 축가로 연주했던 <아름다운 로즈마린>, 기운차게 활을 긁어대며 시작하는 <사랑의 기쁨>, 어디 그 뿐인가요. <비엔나 기상곡>에 조금은 오스트리아 출신인 작곡가에게 낯설기만 할 <중국의 북>도요. 크라이슬러의 소품은 누구라도 흥얼거리게 친숙하지만 연주하는 사람에게는 기막힌 활 놀림이 어려워 선뜻 나서기가 쉽지 않은 곡이기도 하지요.

왜 그런 말 있잖아요, ‘거장의 실력은 소품에서 드러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양반의 음악 들릴 때마다 자세히 살펴보면 말만 들어도 감탄이 나오는 명연주자의 음반이 대부분이더라고요.

그 어린소년, 이제는 더 이상 무식하지도 어리지도 않은 헌헌장부가 됐군요, 말수 적고 신중한 청년이 된 겁니다.
 

그렇긴 해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어릴 적 음악을 들으며 ‘외로워’를 종알거린 눈 큰 아이예요. 그러니 아무리 다 컸어도 예전의 이 애기 소년이 외롭지 않게 부모는 건강 잘 유지하며 지긋이 지켜줘야 할 의무가 있어요. 최소한 그 감성 풍부한 이 청년이 결혼해서 여섯 살 먹은 아들을 둘 때까지는 말입니다. 꼭입니다.
지금은 어떤 음악을 듣는지 기회 닿으면 물어봐야겠습니다.

참 그러고 보니 운전솜씨가 꽤 좋은 모양이던데 크라이슬러 자동차를 탐내는 건 아닐는지요. 이런 난감한 상황에서는 시치미가 제일입니다. ‘돈이 웬수라니까요!’

‘크라이슬러 나빠요!’
여섯 살 배기 사내아이를 ‘외롭게’ 만들었으니 말입니다.

에디슨이 축음기 발명한 시기 쯤 녹음한 크라이슬러 자신의 연주는 복원은 시켰지만 잡음이 많이 들려요. 소품은 매끄럽고 편안한 연주가 듣기에 좋더라고요. 그러니 누구의 연주든 혹시라도 쓸쓸해지면 한 번씩 들어도 좋지 않을는지요? 

[라임 라이트]에서 남자주인공을 맡았던 찰리 채플린과 몹시 비슷해 보이는 콧수염의 크라이슬러 사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어요. 세기말적 분위기 물씬한 이 남자의 기막힌 음악에 이제 더위가 조금은 주춤하고 계절은 식순에 따라 가을이 될 텐데.

여러분도 함께 외로우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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