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 오르비에토를 거쳐 피렌체로

이탈리아 고속도로 공사 이야기(장기간의 공사와 더딘 공사 속도)를 가이드로부터 들으면서 이 나라의 문화와 환경을 짐작해 본다. 물론 우리나라 고속도로의 모범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동시에 들었는데 우리나라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당시 고속도로를 처음 건설할 때와는 많이 달라졌고 또 본질적으로도 이 나라와는 모든 것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도로 주변으로 보이는 평원은 첫날부터 나를 놀라게 했는데 끝없이 펼쳐진 농토와 휴경지를 보면서 산지만 가득한 우리 땅과 비교해서 약간의 부러운 생각도 들었다. 오늘은 이 환경에서 농사를 지을 미래의 농부들이 다니는 농업계 실업고교를 방문할 예정이다. 

오르비에토

로마에서 북서쪽으로 96㎞ 떨어진 팔리아강(江)과 키아나강(江)의 합류점에 있다. 해발고도 195m의 바위산 위에 위치하며, 케이블카로 오르내린다. 부근의 농촌에서는 포도가 많이 생산되며, '오르비에토'라는 이름으로 생산되는 백포도주가 유명하다. 철도와 도로를 통해 로마, 피렌체와 연결된다. 우리가 내려서 처음 본 것도 빠른 속도로 달리는 유레일의 열차였다.

 

▲ 산정도시 오르비에토에서 본 산 아래 풍경

산이래야 겨우 195m이지만 평지에서 오르기 때문에 케이블카로 5분 이상을 오른다. 이 케이블카로 관광객을 실어 나르고 올라가면 우리나라 마을버스와 같은 버스로 마을 중심부에 있는 두오모 앞에 내려준다. 버스에 운전하는 사람을 포함해서 거의 노인들이 전부인 마을 같았다. 청년이 없는 농촌은 우리나 이탈리아나 같은 흐름인 모양이다. 거리에는 특산품을 파는 작은 가게들이 있고 골목들은 중세의 느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시간여행을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 오르비에토 거리 풍경

중세 유럽을 휩쓴 페스트를 피하기 위해 산정으로 오른 당시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 이제는 슬로우 시티라는 다소 엉뚱한 패러다임으로 옮겨가는 것을 보며 시간과 문화와 역사의 혼란스러움, 그리고 그 속에서 늘 생기는 사람들의 적응능력을 생각해 본다.

▲ 오르비에토 두오모
 

서양의 문화는 광장문화다. 어디를 가든 광장이 있고 거기에는 또 어김없이 교회당이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큰 교회를 두오모라 부르는데 본래 뜻은 돔(Dome), 즉 둥근 지붕이라는 말에서 출발하여 큰 교회(주교가 있는 교회)로 발전하여 정착된 말이다. 오르비에토의 두오모는 마을 크기와 비교해서 몹시 웅장하다. 그 옛날 저 성당을 건축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와 땀을 흘렸을까? 이국의 여행자의 눈에는 화려한 고딕양식의 중심인 장미의 창(고딕 양식의 성당 중앙에 둥글고 화려하게 장식한 창)이 조금은 낯설어 보였다.  

플로렌스(피렌체-꽃의 도시)

학교(ISTITUTO TECHICO AGRARIO)를 방문했다. 우리로 말하자면 농업계 전문 고등학교인 이 학교에 들어서니 학교 부지가 정말 넓다. 2005년부터 2009년까지 내가 근무했던 경남자영고가 농업계 학교여서 나에겐 이 학교가 매우 친숙하게 느껴졌다. 여러 재배포장(일종의 실험실)을 보면서 농업계 학교의 공통점을 본다. 학교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실습중인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우리 아이들과 비교해서 밝고 낙천적인 모습이었다. 우리 아이들이나 이 나라 아이들이나 모두 같은 또래이고 동 시대를 사는 아이들이므로 비슷한 감정과 느낌을 가졌을 텐데 이곳 아이들이 조금 밝아 보이는 것은 아마도 우리의 교육제도 탓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하지만 각자에게는 각자의 제도와 문화가 있는 법, 비관적인 시각으로 볼 문제는 아니다.

이 학교는 20세기 초에 세워진 학교로서 학교 역사관에 무솔리니가 방문한 사진을 보았는데 혁명의 어릿광대 무솔리니에 대한 이탈리아 사람들의 생각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학교 내부는 마치 오래된 건물들의 전시장처럼 노후했고 지친 듯 했으나 이상하게도 거기에 나름의 생명력을 불어 넣어 사용하고 있는 이 나라 사람들의 특유한 전통에 대한 태도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교장 선생님께서 늦게 나타나시는 바람에 우리의 일정도 조금 미뤄졌지만 우리나 그들이나 모두 개의치 않는 분위기였고 오히려 천천히 학교를 둘러보며 이곳저곳에 드러나 있는 이탈리아 교육의 현 주소를 관찰 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농업은 우리와는 달리 노동 집약적 산업이 아닌 것이 분명해 보였다. 왜냐하면 사철 온난한 기후와 비옥한 토질, 그리고 상대적으로 넓은 경작지덕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먹고 사는 것에 전혀 지장이 없다. 따라서 우리의 농업교육처럼 집약적인 재배의 기술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자라도록 단지 보조해주는 농업으로 정착된 듯 보였다. 우리의 농업처럼 땅에서 농작물을 쥐어 짜내기 위해 땅과 싸우는 농업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상호 협조하는 수준의 농업인 셈이다. 그러니 교육과정도, 방법도, 방향도 달라진다. 그렇다고 우리의 농업이 이들을 배워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땅의 농업은 우리의 전통과 문화, 그리고 제도를 바탕으로 현재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발전되어 왔기 때문이다.

피렌체를 보다.

피렌체를 조망하기 위해 일행은 미켈란젤로 언덕에 올랐다. 피렌체 시가가 한 눈에 들어오는 그 언덕 위에는 비록 모조품이기는 하지만 다비드 상이 서 있었다. 구약성경의 영웅적 인물인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통일한 최초의 왕이었다. 그의 아들이 바로 솔로몬이다.

 

▲ 피렌체 풍경

언덕에서 보이는 둥글고 붉은 돔은 바로 피렌체의 두오모이다. 아르노 강을 사이에 두고 많은 다리가 놓여 있는데 그 중 특이한 것은 베끼오 다리다. 지붕이 있는 이 다리는 아르노 강을 사이에 두고 있었던 베끼오 궁의 관리들이 비를 맞지 않고 건너기 위해 지붕을 씌웠는데 그 후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남아 2차 대전 중 독일군의 공습도 피해 우리가 지금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은 보석상들이 가득 들어서 있다 한다.

 

▲ 미켈란젤로의 다윗상

일행은 걸어서 시뇨리아 광장에 도착했다. 서양 어디나 모두 비슷하지만 이들은 모두 상(像 )을 좋아한다. 광장에 많은 형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봄으로서 뭔가 문화적 일체감을 느꼈던 모양이다. 여기도 예외가 아니어서 언덕에서 보았던 다비드상이 또 있고 그 옆으로 헤라클레스, 페르세우스, 페르세포네, 아폴론 등의 신들이 다양한 포즈로 서 있었다. 이런 조형예술은 동양, 특히 우리나라의 정적이고 관조적인 문화와 반대편에 있는 것으로서 우리에겐 다소 어색한 면도 없지 않다.

85m 높이의 조토의 종탑은 가히 압도적이었는데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완성된 것이라 한다. 두오모의 앞에는 산 조반니 세례당이 있었는데 단테가 세례를 받은 이곳의 정문 조각은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이라고 칭송할 만큼 정교하고 아름다운 것이었지만 지금은 모조품이어서 그런지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 정치가이자 외교관이었으며 신곡의 저자 단테의 생가에는 그의 흉상만이 외로이 있었다.
 

골목골목을 지나 르네상스의 주인공 단테의 생가가 있었다. 그곳에 단테가 태어났다는 사실이 뭐 대수일까만 그곳에 특별한 의미를 두는 것은 후세 사람들의 순수하거나 혹은 상업적 의도로 보일 뿐이다. 우리가 아는 단테는 단지 ‘신곡’이라는 불후의 저작을 남긴 문학가로 알고 있지만 사실 단테는 정치가이며 군인이며 외교관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삶을 망명자로 살았고 죽음도 망명지에서 맞이했다 한다.

다시 몇 골목길을 돌아 이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열다섯 때 처음 피렌체에 와서 살았던 집을 본다. 참 무의미한 일인듯 싶었지만 그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의 삶이 스쳐간 흔적을 보면서 르네상스를 완성한 위대한 천재의 유년기가 결코 행복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공증인의 서자로 태어난 그가 불세출의 인물로 성장하는데 이 피렌체라는 도시가 크게 작용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메디치가

피렌체를 돌아보며 도시 국가였던 피렌체 공화국의 실질적 지배자였던 메디치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15~16세기 피렌체공화국에서 가장 유력하고 영향력이 높았던 시민 가문이며 공화국의 실제적인 통치자였다. 학문과 예술을 후원하여 르네상스시대가 피렌체에서 열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 가문은 토스카나 지방에서 농사를 짓던 선조 몇몇이 아무래도 성공하기 위해서는 농사보다는 그 시대에 막 발전하기 시작한 상업에 종사하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 하에 가까운 상업도시 피렌체로 향한 것이 이 가문의 성공신화 출발점이다.  

그 뒤 무역업과 은행업을 통해 부를 키운 이 가문은 교황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세력을 확장하여 거의 400년 가까이 피렌체를 지배했다. 이 가문이 유명한 것은 그들이 문화와 예술을 장려하여 인구 300만의 피렌체를 세계적인 예술의 중심지로 만든데 있다. 그렇다면 메디치 가문이 수백 년에 걸쳐 예술가들을 후원한 결과 얻게 된 엄청난 양의 예술품은 어떻게 되었을까? 가문의 마지막 계승자 루이사는 메디치 가문의 모든 예술품을 토스카나 대공국과 피렌체에 기증하도록 유언을 남겼고, 그 결과 일체의 예술품들이 도시 밖으로 유출되지 않아 오늘날 피렌체는 세계의 관광객이 줄을 잇는 명소가 되었다.

문득 우리의 현실을 이러한 역사와 비교해보니 우울해졌다. 타의에 의해 우리의 엄청난 문화재가 외부로 유출되고 소실된 반면 후손들의 무지로 인해(자의에 의해) 우리나라 밖으로 반출된 문화재가 얼마나 많은가? 영국의 대영박물관과 미국의 스미소니언 자연사 박물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그리고 세계 각처의 유명 박물관에 전시된 우리의 문화재와 피렌체의 문화재는 기막힌 대조를 이루고 있는 듯하다.

<김 선생의 오솔길>은 현현적적 시민기자가 클래식 평론, 영화 평론, 책 평론 등으로 세상읽기를 하는 공간입니다. 현현적적은 곤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김준식 교사의 필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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