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 학교 방문, 로마시내 유적 답사

바티칸 시티

바티칸 시티는 이탈리아의 로마 북서부에 있는 가톨릭 교황 국이다. 19세기 이탈리아가 근대 통일국가로 바뀌면서 교황청 직속의 교황령을 상실하게 되자, 1929년 라테란(Laterano) 협정을 통해 이탈리아로부터 교황청 주변지역에 대한 주권을 이양 받았다. 세계 최소의 독립국들 중의 한 나라다.

교황이라는 단어는 지극히 역설적이다. 교회의 황제라고 풀이 될 수 있는데 이는 성(교회)과 속(황제)이 결합된 단어이다. 성과 속은 동시에 도저히 결합할 수 없는 세계라는 것은 상식인데 상식을 넘은 이 단어가 통용되고 있다. 하지만 별다른 저항 없이 천년 이상을 써 오고 있고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며 동시에 막강한 위력으로 존재하는 단어이다.

▲ 저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벽과 문을 보며 묘한 저항감을 느꼈다.

그 교황이 통치하는 세계의 입구는 어마어마한 높이의 성벽으로 둘러져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 아침부터 엄청나게 길게 줄지어 서 있었다. 이 나라 안에 있는 박물관에 전시된 고대의 유물과 찬란한 르네상스의 예술품 감상을 위한 것이었지만 줄을 서고 있는 내내 불편한 마음은 어찌 할 수 없었다. 불편한 마음의 원인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불편한 것은 높게 둘러져 있는 성벽의 권위에 대한 알 수 없는 저항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성벽에 대해, 또 그 높이의 위압감에 대해 말하지 않으니 나 또한 그럴 수밖에.

 

바티칸 박물관은 말 그대로 예술품의 천지

복도 회랑 빈곳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고대로부터 중세에 이르는 조각품이 즐비하다. 뿐만 아니라 천정, 복도의 빈 공간에는 한 치의 틈도 없이 벽화로 가득하다. 천국을 꿈꾼 사람들이 천국을 상상하며 만들었을 이 엄청난 작업에 잠시 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 저 엄청난 조각예술들 중 그들의 것보다 이민족의 것이 더 많다.

절대 존재이며 창조주인 신에 대한 경외심과 숭배, 그리고 그 마음들을 顯顯시키는 작업은 선과 악의 경계를 구분 지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작업들이 순수한 자유의지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조각품들은 또 다른 의미로 해석되어질 수 있다. 바티칸 박물관에 있는 작품들 중 이 나라(이탈리아)의 작품이 아닌 것도 많이 보이는데 이것들은 아마도 중세로부터 강화된 교황들의 절대 권력에 의해 거의 빼앗아 온 것들임에 틀림없다. 당시에야 살아있는 신에게 바치는 봉헌으로 여겼겠지만 지금의 눈으로 보아 그것은 분명히 약탈의 다른 방법일 뿐이다. 우리 문화재가 일본에, 미국에, 그리고 유럽 각지에 흩어져 있는 이유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이리라.

르네상스 3대 거장(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의 작품인 베드로 성당, 성당 내부 장식, 성당의 건물 배치, 기타 각종 조각 및 회화를 가까이 보면서 진정 이들이 도달하고자 했던 세계는 어디이며 또 이 위대한 작품을 통해 이루려고 했던 현실에서의 세계는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본다. 물론 신의 나라와 그 顯顯이었겠지만 이교도이며 또 이국의 여행자에게는 쉽게 다가오지 않는 세계임에 분명하다.

 

▲ 베드로 성당의 큐폴라 내부. 천국으로 향하는 그들의 세계관을 본다.

성 피에트로 대성당의 큐폴라 밑에 서서 내부 천정을 보니 서양 사람들이 생각한 천국의 모습일 것이라고 추정해본다. 정점으로 향하는 모든 것들의 너무나 정교한 봉사와 헌신이야말로 이들이 상상한 천국이었고 그것을 현실화 한 것이 바로 원개지붕(큐폴라)이었을 것이다.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은 사진 촬영이 불가하다 하여 미리 밖에 설치된 간략한 그림으로 설명을 듣는다. 성서의 이야기를 토대로 그린 천지창조이지만 미켈란젤로의 독창적이고 천재적인 해석에 힘입어 단지 성서의 이야기를 옮긴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경지를 만들어 낸 걸작이다. 최후의 심판 역시 그림과 관련된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들으며 16세기의 중세인으로서의 미켈란젤로가 아니라 오늘,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동시에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로서의 그를 느낄 수 있었다.

 

▲ 천지창조 전체 그림

성당 내부 회랑은 인파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 인파의 숫자보다 더 많은 예술품들이 사람들을 압도했으며 그 분위기는 마지막 홀(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이 그려진 방)에서 최대치가 된다. 성스러움과 종교적 영광을 사람들에게 느끼게 하려는 절묘하고 치밀한 계산에 의한 내부배치인데 이 모두가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전의 사람들에 의한 것이라니 더욱 놀랍기만 하다.

▲ 회랑내부의 화려한 천정 벽화를 보며 이들이 다가가고자 했던 세계에 대해 짐작해 본다.

건물을 나서 밖으로 나오자 우리가 방송에서 보는 광장이 나온다. 바로 성 베드로 광장(Piazza San Pietro)이다. 이탈리아 바로크양식의 거장인 화가·조각가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가 1656년 설계해, 12년 만인 1667년 완공하였다. 입구에서 좌우로 안정된 타원형이며, 가운데서 반원씩 갈라져 대칭을 이룬다.

 

광장 중앙에는 로마의 3대 황제 칼리굴라(Caligula)가 자신의 경기장을 장식하기 위해 서기 40년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가 우뚝 서 있다. 이 오벨리스크는 로마로 옮겨진 뒤 경기장에 세워졌으나, 후에 경기장에서 죽은 순교자들을 기념하기 위해 1586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정복의 역사와 피의 역사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역사다. 하지만 천국의 평화를 바라는 이 위대한 예술적 광장에 저 볼썽사나운 뾰족한 오벨리스크는 분명 부조화로 느껴지는 부분이다.

 

학교를 방문하다.

이탈리아는 대학과 같은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아야만 대접받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대학 입학이 과열되어 있지 않다. 대학은 사회에서 취직자리를 얻기 위한 준비 과정이 아닌 순수학문의 장이 된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전통과 문화 때문에 유아기, 초등교육시기부터 학문 위주의 교육보다 인성을 중시하고 사회성과 개성을 우선하는 교육과 건전한 신체적, 정신적 발전을 도모하는 놀이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7세부터 11세까지의 5년간 초등의무교육이 끝나면 12세부터 14세까지 다닐 수 있는 3년제 중학교 의무교육이 있다. 학년별 1년에 3번의 서술적인 평가를 받고 국가 관할 하의 졸업시험을 본 후 15세부터 19세까지 5년간 이루어지는 고등학교 교육은 의무교육이 아니다. 그 종류에는 인문계고등학교, 자연계고등학교, 언어고등학교, 상업기술고등학교, 초등교육자양성고등학교 , 예술 고등학교 등이 있다.

우리가 방문한 LICEO ARISTOFANE 는 인문계 고등학교로서 한 학년 10학급이며 한 학급에 25명 정도가 다니는 규모가 큰 학교였다. 수업시간은 오후 2시면 거의 끝나고 개인별로 학교에서 제시한 숙제와 개인적 활동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가 방문했을 때 학생들은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나라와 다른 교육제도와 방식은 각 나라의 문화적 특수성에 기인하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 할 수는 없었지만 그런 방식으로 진행됨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우리의 과열된 교육풍토를 생각하고 또 내가 지금까지 교육해 왔던 아이들과 학교를 생각해보니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이를테면 우리 사회는 용광로처럼 뜨거운 사회로서 자신의 역량을 펼치기 위해서는 엄청난 열기와 싸워야 하고 그 싸움은 좀처럼 끝나지 않는 반면 이 나라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와 역량에 자족하고 그것으로부터 삶을 계획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과 타인을 통제하고 또 통제받는 것에 너무나 익숙하다. 그것은 때로 우리의 힘이 되어 우리를 유지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경쟁과 통제로부터 자유로우므로 창의적이고 자발적이기는 하겠지만 지나치게 개별적이고 동시에 에너지가 떨어지면 지체와 나태의 약점도 동시에 있을 것이다.

 

▲ 교장 선생님의 친절한 설명

LICEO ARISTOFANE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친절하고 상세한 설명을 들었다. 우리의 권위적 교장 선생님과 대비되는 이탈리아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을 보면서 우리와 이탈리아의 교육제도 딱 이만큼 멀리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로마의 유적

트레비 분수(Fontana di Trevi)는 1453년 교황 니콜라우스 5세가 고대의 수도 ‘처녀의 샘’을 부활시키기 위해 만든 것에서 시작된다. 그 후 1726년, 교황 클레멘스 13세 시절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됐다. 이때 분수의 설계는 니콜라 살비가 담당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중심으로 그의 아들 트리톤, 해마 등의 조각이 배치돼 있다. 어깨 너머로 동전 하나를 던져 넣으면 로마를 다시 한 번 방문할 수 있다고 하며, 두 번째 동전을 던져 넣으면 소원을 빌 수 있다는 속설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이 마치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돌아서서 동전을 던지고 있었다.

▲ 로마 밖에서 수로를 통해 가져온 물이 모이는 장소를 분수로 만들어 놓았다.
 

중 고등학교 미술시간 석고데생의 모델로 유명한 아그리파는 로마의 집정관이었다. 그 아그리파 시절에 만든 거대한 신전이 바로 판테온이다. 판테온이라는 명칭은 그리스어로 모두를 뜻하는 판(Pan)과 신을 뜻하는 테온(Theon)이 합쳐져 만들어 졌다. 아그리파 집정관에 의해 처음 건축된 판테온은 로마에서 발생한 대화재로 완전히 소실되었고 이후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로마를 재건하기 위한 계획으로 다시 건축되었다. 당시 판테온은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 정확하게 전하는 바 없으며 현재는 신전으로만 알려져 있다. 아그리파 집정관 때 처음 만들어진 건축의 흔적으로는 석판이 남아있는 것으로 전한다.

▲ 거대한 구형 돔인 판테온 내부. 뚫린 곳의 지름이 무려 9m 나 된다.

돔의 채광은 돔 정상에 설치된 지름 9m의 천창뿐이며, 벽면에는 창문이 없고, 거대한 본당의 외형에는 전혀 장식이 없다. 그 수적 비례의 미와 강대한 내부 공감의 창조라는 당시의 경이적인 토목기술로서 서양건축사상 불후의 명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이집트에서 가져온 하나의 돌로 깎아 세워진 8개의 기둥을 보며 로마의 역사를 다시 생각해본다. 또 동시에 우리의 석굴암을 떠 올리며 규모의 차이에 압도되어 우리 조상의 탁월함이 가려지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 진실의 입에 손을 넣고 계신 선생님

일행은 “진실의 입”으로 향했다. 로마시대에는 가축시장의 하수도 뚜껑으로 사용되었다고도 하는데, 확인되지 않는다. 강의 신 홀르비오의 얼굴을 조각한 직경 1. 5m 의 이 대리석 돌은 중세 때부터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사람을 심문할 때 손을 입 안에 넣고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손이 잘릴 것을 서약하게 한 데서 '진실의 입'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그 진실이란 누구의 기준이며 무엇으로부터의 진실인가? 참으로 모호한 유적임에도 로마 관광의 필수 코스가 된 것을 보면 할리우드 영화(로마의 휴일)의 공도 크지만 대수롭지 않은 유적에 이야기를 만들어 낸 이탈리아 사람들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로마의 榮華를 보기 위해 우리는 캄피돌리오 언덕으로 향했다. 그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이 그 유명한 캄피돌리오 광장이다. 고대 로마의 발상지로 전해지는 7개 언덕의 하나인 캄피돌리오 언덕 한 모퉁이에 미켈란젤로의 구상으로 1547년에 건설되었다. 큰 계단 위에 전개된 이 광장은 좌우 양쪽의 한 쌍의 건물, 즉 카피톨리노박물관(1644∼1655)과 팔라초 콘세르바토리(1564∼1568) 및 안쪽 정면의 시청사(1592년 완성)의 3개 건물로 둘러싸여 있다. 좌우 건물이 마주보는 간격은 투시효과(透視效果)의 조화를 위하여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향할수록 넓어지게 배치되어 있다. 광장 중앙에는 로마의 현제(賢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마상이 있다. 광장과 건물의 디자인은 그 수법의 독창성과 공간통일(空間統一)의 탁월성으로 해서 미켈란젤로의 가장 뛰어난 건축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미켈란젤로 그의 손길은 로마 시내 어디든 발견할 수 있다.

▲ 포로 로마노 유적. 포럼이라는 말의 기원이 된 곳이기도 한 이곳은 공회당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광장에서 다시 언덕 반대쪽으로 보이는 광경이 그 유명한 포로 로마노이다. 포로 로마노는 고대 로마인들이 시민생활의 중심지로 생각하던 신전과 공회당 등 공공 기구와 함께 일상에 필요한 시설이 있는 곳이다. 19세기 이전까지 우시장으로 쓰이던 곳을 발굴해보니 그 예날 로마의 영광이 속속 드러났다. 포로 로마노를 보고 있노라면 역사란 시간 속에 존재했다가 묻히고 또 다시금 살아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겹겹이 쌓인 유물들은 어느 시기의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역사적 가치가 달라진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한 층을 걷어보니 그 밑에 다른 진실이 숨어 있다. 또 한 층을 벗겨보니 거기 또 다른 진실이 있다. 로마 문화의 면모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일순간 땅 밑으로 가라앉았던 폼페이의 모습들과 여기 포로 로마노에서 느끼는 생각이 내 머리 속에서 묘하게 교차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제 그 유명한 콜로세움으로 가기 위해 이탈리아 통일의 영웅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의 기념관 앞을 지났다. 1885년 건축가 쥬세페 사코니(Giuseppe Sacconi)의 설계로 1911년 완공된 이 기념관은 통일된 이탈리아의 첫 번째 국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Vittorio Emanuele II, 1820~1878)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베네치아 광장(Piazza Venezia)과 캄피돌리오 언덕 사이에 위치한 이 건축물 아래에는 1차 세계대전 때 숨진 무명용사들의 묘가 있어 꺼지지 않는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 퇴락하였지만 여전히 굳건한 콜로세움

콜로세움은 기대만큼 멋진 유적은 아니었지만 로마의 랜드 마크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Amphitheatrum Flavium)'이라고 한다. 플라비우스 왕조 때 세워진 것으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하여 80년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에 완성하였다. 글래디에이터(劍鬪士)의 시합과 맹수연기(猛獸演技) 등이 시행되었으며, 그리스도교 박해 시대에는 신도들을 학살하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피지배계층의 관점이나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는 말할 수 없이 잔인하지만 고대 로마 시민들에게 원형 경기장은 경기를 보며 로마 시민으로서의 일체감을 느끼게 해 주고 황제지배의 위엄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치의 하나였다. 지금은 벽면에 박힌 철 구조물이 빠져 마치 총에 맞은 듯 보이는 이 거대한 석조건축물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전해주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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