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선생의 오솔길]대지의 깃발 - 제주도

일상성을 탈피하는 방법 중에서 여행은 매우 효과적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래 왔듯이 직장에 묶인 몸이라 주말 동안 여행은 오히려 일상성의 탈피에서 오는 신선함 보다는 짜증나는 번잡함이 더 컸었는데 그 직장의 굴레를 살짝 벗어던지고 이렇게 오롯이 주중 3일을 여행 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참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다.

첫날 

제주도는 벌써 여러 번 다녀왔다. 갈 때마다 달라진 모습이 마치 요즘 성형수술로 비슷하게 예뻐지는 연예인들을 보는 것 같아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그런 탓에 이번 제주도의 모습도 별로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들의 여행 일정이 특별히 제주도 여행의 달인(?)이신 강철오 선생님께서 만드신 여행 일정이라 제주도의 숨겨진 모습에 대한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새벽(2시 30분 기상)부터 나선 여행이라 제주도에 도착해보니 4월 10일 오전 8시를 조금 넘기고 있어서 하루를 온전히 여행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도두봉(島頭)이었는데 제주도에 흔히 보는 작은 오름(註: 한라산의 화산체가 완성된 이후 산록 주변의 틈새를 타고 쌓인 화산 쇄설물로 이루어진 언덕)이었다. 언덕을 올라보니 벚꽃은 이미 졌고 유채는 흐드러져 푸른 바다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잘 모르지만 언덕에서 보는 제주시와 이름 모를 등대는 여기가 섬이라는 것을 알려주기에 충분했다.

▲ 언덕 위 유채꽃과 바다.

여행일정대로 일행들과 함께 김만덕과 항일의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모충사와 기념관을 거쳐 사라봉을 거치는 제주 올레길 18코스의 일부를 처음 걷기로 했다. 4월 중순의 날씨라고 하기에는 너무 추운 날씨에 바람조차 강했지만 걸을 수 없을 만큼은 아니었다.  

우리 근대사에 있어 제주도는 비극의 섬이다. 특히 4.3으로 빚어진 이념적 갈등과 그 상처는 사실 현재까지도 완전히 치유되지 않고 있는데 거기다가 최근의 제주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문제까지 있으니 이 섬의 평화는 오로지 관광객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조차 든다.

바다가 보이고 그 언저리에 피어나는 유채는 참으로 아름다웠지만 길 어귀에 서 있는 4.3 유적지 표시에 돌연 마음이 숙연해지고 동시에 아파온다. 하여 이런 시를 스스로 지어 4.3을 진혼했다.

▲ 4.3 유적지 가슴 아픈 역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鎭魂

孑孑坤之旒 (혈혈곤지류)외로운 대지의 깃발,

慘颻偖吾域 (참요차오역)애처롭게 나부껴 찢기는 우리의 땅.

回回𪎾蕓華 (회회정운화)해마다 노란 유채 피어도,

不成慯血史 (불성상혈사)끝나지 않은 가슴 아픈 피의 역사.

하지만 산과 바다가 서로 접해있고 화산 용암으로 형성된 주상절리의 절벽은 그저 아름다웠다. 사라(紗羅)봉으로 오르는 언덕길은 이미 절정을 넘긴 벚나무들이 간간히 꽃잎을 날리고 있었고 사람들은 부지런히 오가고 있었다. 아픈 역사는 그렇게 또 한 시대를 건너가고 있었다. 

사라봉 정상은 낙조가 일품이라지만 우리 일행이 오른 시간은 겨우 오전 10시를 넘긴 시각이라 일출도 일몰도 다 그곳에 두고 다른 목적지를 향해 언덕을 내려왔다.  

틈새로 찾은 "O' 설록"은 늘 그렇지만 자본과 자연의 상관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자연은 그대로 두면 아름답지만 돈이 되지 않고, 자본을 투여하면 돈은 되나 이미 자연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는 자본과 자연의 관계가 늘 내 머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점심을 먹고 나서 제주국제학교를 방문했다. 나의 개인적 성향 때문에 이 학교를 본 모든 장면을 머릿속에 지우고 싶었다. 나는 지난 20년 이상을 이 땅에서 비교적 낮은 사람들의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교육이 존재해야 할 가장 중요한 목적은 부와 권력으로부터 지배당하지 않고 오히려 교육을 통해 부와 권력을 향해 당당할 수 있는 주체적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국제학교를 둘러 본 순간 지난 20여 년간 내가 아이들에게 힘주어 말한 모든 말은 한순간에 거짓말이 되었고, 나 또한 심각한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는 거대 자본과 권력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드러낸 그들의 세습의지와 교육이라는 미명을 덮어 쓴 계급과 계층의 선긋기만 내 눈에 보였다. 견학 내내 나는 알 수 없는 분노 때문에 단 한 컷의 사진도 찍을 수 없었다.  

그 나마 다시 올레 길 12코스 수월봉과 엉알 해안으로 가 바다를 보며 마음에 위로를 삼았다. 화산섬인 제주도가 형성되면서 흘러나온 뜨거운 용암이 켜켜로 쌓인 암벽을 파도와 바람이 깎아 만든 해안선은 기묘한 모습으로 지난 세월을 견디고 거기 있었고, 바다는 또 영겁의 세월동안 용암이 굳은 검은 바위에 흰 포말로 부서지며 또 거기 있었다.

낙조시간은 아니었지만 비슷한 감상을 느낄 수 있는 장면으로 마음을 위로했으나 제주도라는 섬의 역사와 낮에 본 국제학교의 뒷면에 버티고 서 있는 권력과 자본의 검은 그림자 때문에 우울한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

둘째 날 

오늘은 한라산 등반과 올레길 탐방으로 팀이 나뉘는 날이다. 나는 이미 한라산에 가 본 경험이 있고 이번에는 올레길 탐방이 주요한 목적이었기 때문에 올레길 탐방을 선택했다.

  올레길 5~6코스 중 큰엉(큰 언덕) 경승지에서 출발했는데 낮은 해안으로 연결된 길이어서 바다와 해안가에 핀 봄꽃들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도 함께 볼 수 있는 멋진 길이었다.

▲ 큰엉 절벽 밑의 찬란한 바다

자연의 색은 늘 신비롭다.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빛은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봄날, 바다와 육지의 꽃, 바다에 접한 해변의 암석들과 모래가 빚어내는 색은 참으로 위대했다. 

▲ 위대한 색의 조화

사람들이 사는 모습들도 너무나 다양하다.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모습과 개성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들의 공간을 보며 지금 내가 잠시 벗어나 있는 일상성의 위대함에 대해 생각해 본다.

점심 식사 후에 들른 에코 랜드는 이미 자본에 의해 점령된 듯 보였으나 거기 곳자왈이라는 특이한 자연환경을 볼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제주도의 화산쇄석 위에 자라난 활엽수들의 처절하고 끈질긴 생명력으로 이루어진 숲을 보며 나의 삶을 점검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곳에 펼쳐진 인공호수와 하늘, 그리고 숲길은 비록 자본으로 조성된 것이었지만 나름대로 감동을 주는 풍경을 제공했다. 

▲ 뜬금없는 풍차, 그런 대로 멋있었다.
다음으로 들린 절물휴양림은 인공조림으로 형성된 숲이다. 하지만 하늘로 곧게 뻗은 나무들이 또 다른 감흥을 준다. 이름 하여 ‘장생의 숲길’로 명명된 길을 보며 인간의 욕망은 곳곳에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오래 사는 것이 잘 사는 것과 같은 뜻은 분명 아닐 것인데 지금 우리의 삶의 모습은 오래 사는 것에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셋째 날(마지막 날) 

오늘도 두 팀으로 나누어 움직이게 되었다. 한 팀은 골프구경을 선택했고 한 팀은 올레길 을 선택했다. 나는 올레길 팀을 선택했다. 오늘 가 볼 곳은 올레 10코스 중 일부인 산방산 앞 용머리 해안과 송악산 해안 길 이었다.

  용머리 해안의 바위는 180만 년 전 수중에서 폭발한 응회암(화산재가 쌓여 생긴 암석)층이 해 수면 위로 상승하여 만들어낸 약 800m 길이의 해안 지형이다. 긴 세월 동안 파도와 바람이 깎아 만든 이 놀라운 바위들은 기묘한 모습으로 백만 년의 신비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사실 백만 년이란 세월은 우리에게 너무나 긴 세월이지만 자연의 시간으로 보면 순간이나 다름없다. 그 알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의 벽을 넘어 현재 우리와 마주하고 있는 이 위대한 자연의 모습에서 짧은 삶을 살다 사라지고 마는 나의 존재는 너무나 미약하기만 했다.

▲ 용머리 해안의 절벽

해변을 걷다가 마침 굿거리 장면을 보았다. 거기 긴 휘장에는 000미륵불이라고 씌어 있었는데 일 년 내내 저 거친 바다와 그 바다에서 삶을 건져 올려야 하는 사람들의 진솔한 모습과 더불어 자연에 대처하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동시에 보았다. 인간은 부처든 예수든 절대적 존재에게 자신을 맡김으로서 편안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 해안 굿거리 장면

3일 동안 제주도의 곳곳을 보았다. 봄 같지 않은 쌀쌀한 날씨와 제주도의 거센 바람이 우리를 괴롭혔지만 제주도를 느끼는 것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한 이번 여행을 통해 스스로 많이 깊어지고 또 많은 반성을 했다. 일상을 벗어나거나 혹은 변함없는 일상 속에 있거나 그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 ‘일상’이라는 위대함속에 있음도 동시에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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