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 사처니언] 죽어 있는 위인들을 추모하지 않기 위하여

많은 시민들은 죽어버린 지도자와 위인들에게 환호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러했고, 김수환 추기경이 그러했다.

어째서 생전의 적들 마저도 세상을 하직한 위인들에게 관대한 것일까?

그렇게 추모하고 기리는 동안은, 대중은 그들에게 직접적인 위험이 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리고 대중은 그의 위대한 지도자 또한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저지를 수 있는 실수와 실망스런 이야기들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그들을 단결된 힘으로 뭉치는 것을 심각하게 망설이게 하는 것은 아닐까?

지켜야 할 것이 그들의 재산과 땅과 명예이기에 똘 똘 뭉치는 것이 가능하지만, 지켜야 할 것이 한갓 신념, 그것도 불완전한 인간을 신뢰하여야만 하는 희생이라서, 우리는 생업을 위험에 빠트릴 만큼 열정적일 수 없는 것일까?

그것이 일견 현명한 것은 아닐까?

누군가는 의문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스스로를 신뢰할 수 없을 때, 누구도 전체를 신뢰케 할 수 없음을 1219는 보여주었다.

살아있기에, 불완전하기에, 누군가가 필요하기에, 바로 내가 그를 지지해 주어야 한다.

필자가 누구를 지지하건 간에, 그것은 이 글의 주제가 될 수 없다.

설령, 부처님과 예수님을 동시에 지지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에게 모순이 없다면, 선택에도 모순은 없다.

그래서, 스스로의 선택의 부족함을 알기에, 우리는 스스로 선택한 후 신의 선택을 기다렸다.

서양에서는 신탁으로, 동양에서는 진인사 대천명으로 불리웠듯이...

하지만 그 근본은 무엇인가?

무선택이 아니라 선택이다.

그리고 선택에 부끄럽지 않은 말과 행동의 일치이다.

소위 식자는 스스로의 지식의 아름다움에 매몰되어 시민을 무식한 자, 가르쳐야 할 자로 여겼다.

그런 자세로 시민의 지지를, 선택을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다.

진심이 담긴 말 한마디, 한 마디를 던졌는 데도 실패하였다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다.

농부가 씨를 뿌렸듯이 어떤 이는 시민의 마음 속에 신념의 씨를 뿌린 것이다.

그리고 콩을 심은 곳에서는 콩이, 팥을 심은 곳에서는 팥이 수확될 것이다.

인간은 이중적이다.

그들에게는 마음 밭이 있어 열매를 거둘 수도 있고 스스로 씨를 뿌려 수확을 거둘 수도 있다.

피조 세계의 자그만 조물주.

완벽하지 않기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 모습이 아름다운 존재일 뿐이다.

지금 마음 속에 어떤 이를 진정한 사색자로, 지도자로 생각하고 있는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자유이다.

단, 이 글을 맺으면서 드리고자 하는 말은, 값진 자유를 가졌은 즉, 그것을 실행하기를 바란다.

어정쩡한, 미지근한, 자기 것을 드리고자 하는 마음은 전혀 없는 그런 신념은 이제 거두었으면 한다.

삶은 파란만장한 모험이거나,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삶은 진정 있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글에 대한 그대로의 무시도 하나의 선택일 수 있다.

나에게는 그리 아름답지 않은, 차가운 선택이겠지만 말이다.

콩을 심은 곳에서 콩이 날 것이고, 팥을 심은 곳에서 팥이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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