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선생의 오솔길>영화 '은교' 리뷰

▲ 서재에 앉아있는 이적요. 노년의 적요함이 책의 먼지처럼 쌓여있는 풍경

노년

노년은 적요하다. 특별히 신경 쓰지 않으면 모든 것이 조금씩 희미해진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나이 들어가는 당사자는 선뜻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엔트로피의 증가가 몸과 마음에 균형을 맞춰 진행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몸이 먼저 시작되고 마음은 좀체 따라잡지 못한다. 어쩌면 죽는 그 날까지 따라잡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몸과 마음이 차이를 두고 늙어가는 것, 바로 이것이 늘 문제를 만드는 핵심이다.  

이적요(박해일 분), 그는 시인이다. 국민 시인이라는 칭호가 말해주듯 그는 대단한 명성을 가진 시인이며 기념관까지 거론될 정도의 그 분야의 대가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런 그도 하는 수 없이 늙어가고 있고 스스로 늙어감에 당당하려 하지만 갈수록 지쳐가는 육신의 모습이 달갑지 만은 않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언뜻 절망의 눈빛을 보이다가도 그 나마 남아있는 정신의 힘으로 겨우 추스르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듯 그렇게 늙어가는 노인일 뿐이다.  

그런 그의 노년에 문득 종달새인 듯 또는 신기루인 듯 푸르고 싱싱한 생명력을 가진 소녀가 뛰어 든다. 그 소녀의 등장은 이적요의 삶을 흔들고 그 흔들림은 이제 희미해지는 정신과 쇠잔해지는 육신에 알 수 없는 에너지를 제공하고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로 그가 들어간다.

질투 

별들이 제각각 다르다는 것을 이해 할 수 없는 공대생 서지우(김무열 분)는 이적요의 충직한 제자이자 집사다. 이적요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불사하는 그는 안타깝게도 문학적 재능은 없다. 이를 알고 있지만 딱히 내치지 못하고 그를 데리고 있는 이적요다. 서지우와 이적요의 관계는 사실 서지우의 이적요에 대한 집착이며 동시에 그의 스승의 재능에 대한 알 수 없는 질투, 나에게 존재하지 않지만 내가 정말 가지고 싶어 하는 재능을 가진 스승에 대한 가장 원초적인 질투 때문에 서지우는 이적요 주위에 머무르는 것이다.  

스승의 재능을 질투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죄가 아니다. 그 질투의 에너지를 승화하면 흔히 말하는 청출어람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가끔 보게 되고 이것은 결국 스승의 위상을 더욱 높이게 된다. 하지만 서지우는 질투에서 그대로 멈춰있다. 그의 재능 탓도 있지만 어쩌면 서지우의 인간성 자체가 글러먹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이적요의 호의는 오히려 그에게 탐욕을 불러일으키고 그 탐욕은 마침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 시간을 거슬러 젊은 시절로 돌아간 이적요와 푸른 은교의 환상

욕망

이적요의 삶에 나타난 그 푸름과 싱싱함은 ‘은교’(김고은 분)라고 불리는 여고생이다. 이적요의 일상을 책임지고 있던 서지우의 자리를 슬그머니 밀어내고 그 자리를 채운 그녀는 이적요에게 짧은 순간이나마 사막처럼 황폐해지던 육신과 정신에 오아시스처럼 푸르른 환상을 제공한다. 은교와 함께한 순간 이적요에게 은교는 젊은 날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 타임머신이었고 그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그 공간에서 은교와 이적요는 생생한 현실이 되어 서로를 탐닉한다. 

욕망은 불꽃이다. 활활 타오기 위해서는 끝없이 에너지를 요구한다. 더불어 그 불꽃은 불꽃이 클수록 의외로 빨리 꺼져 버리고 불이 꺼진 곳에서는 매캐한 연기만 눈물을 자극한다. 이적요의 은교에 대한 느낌이 욕망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욕망이든 또 아니든 이적요의 마음은 매우 순수했고 또 열정적이었으며 강렬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은교는 이적요와의 마음을 주고받은 이후 알 수 없는 거센 욕망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그 불길은 엉뚱하게도 서지우와의 욕망으로 번지게 되며 이를 알게 된 이적요는 절망한다. 그 매캐한 눈물의 절망은 노년의 그를 그 이전보다 훨씬 더 가라앉히고 마침내 체념이 되어 더욱 노년을 황량하게 한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관객들은 결국 욕망이란 상대를 불태우고 마는 것이며 그 불타오른 것의 대가는 마땅히 그러하리라는 것에 모두 동의하게 된다. 

장치 

이적요의 집은 원작소설의 분위기를 살리는 동시에 영화적 상상력이 결합된 곳이다. 사계를 보여주는 감독의 배려도 좋았지만 사다리 너머, 숲 건너 반드시 존재할 수 있는 이웃은 없다. 그것은 노년의 적요함을 공간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이며 동시에 그 적요함의 실체는 고독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은교의 등장도 매우 영화적이며 몽환적이다. 처음 안락의자에 누워있는 은교를 잡은 카메라의 시선은 매우 끈적끈적하다. 욕망을 암시한다. 그것은 수컷으로서의 욕망 이상도 이하도 아닌데 이적요는 애써 피하려 한다. 그의 이성과 노년이 그것을 막고 있다. 어쨌거나 은교는 문득 출현한다. 이것은 우리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언제나 예고 없음과 무계획성에 있다. “은교는 이적요에게 나타났다”를 영화는 그렇게 관객에게 보여 줄 뿐이다. 

이 나라 문단의 추천방법과 문학상 수상의 이면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오히려 약한 듯 보인다. 일부러 회피하지는 않았지만 보다 더 예리하게 찔러볼 수 있는 문제였는데도 영화 구성상 그 수위를 조절한 것이 아닐까 싶다. 여전히 인맥중심으로 이어지는 문학적 성공과 명성은 결국 이 나라 전체의 문학적 수준을 훼손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또 책의 판매부수 중심의 자본주의적 논리가 문학의 본령을 훼손하고 있음에도 주목해야 할 부분이지만 영화는 얼핏 스치고 지나가는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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