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생의 오솔길> 그의 삶으로부터 나와 우리의 삶으로

현재

▲ 깔끔하지도 않고 세련되지도 않다. 약간은 불투명하고 약건은 어둡다. 어쩌면 이것이 2012년 현재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정태춘의 생각을 이 앨범표지로 읽을 수 있다.
2012년 5월 16일 오후 1시 54분을 막 넘기고 있다. 바람은 냉랭하고 내 책상위의 茶器는 미지근하다.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없는 그저 그런 현상을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리며 이분법, 또는 다양화의 강박을 느끼며 오후를 소진하고 있다.

  변화를 가장한 음모와 통합이라는 눈가림 속에 이제는 감추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드러내놓고 움직이는 현상으로부터 나는 재빨리 미끄러지듯 수면 아래로 가라앉으려 한다. 정확하게 이것이 나의 중년인 셈인데 확실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분명 살아온 지난날에 대한 가벼운 배신이며 또 부정일 것이다. 그러나 어찌 할 것인가? 이미 나의 칼은 무디어졌고 나의 이상은 지나치게 가벼워졌으며(어쩌면 지나치게 무거워졌는지도) 내가 숨 쉬는 공기는 탁해졌다. 변명을 위한 변명인가!

  바람이 계절을 부정하고 시절은 역사를 부정한다. 어찌어찌하여 이만큼 흘러 왔는데 와보니 이곳이 아니었다는 유머처럼 지금 우리의 상황이 그와 비슷하다. 딱히 무엇이 얼마나 잘못되었다는 기준조차 희미해진 시대에 돌아갈 곳도 돌아가고 싶은 지점도 없는 낭패감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무기력의 공기가 우리를 감싸고 있을 뿐이다. 

아! 정태춘.

그의 노래를 처음 만난 것은 아마도 1981년쯤으로 기억한다. 처음 들은 노래는 ‘산사의 아침’이었다. 이제 막 출가한 비구의 번뇌어린 생활이 노랫말의 주요한 내용이었는데 아마도 정태춘 본인의 느낌이나 경험도 배어 있었을 것이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불교’라는 종교적 취향이 노래를 통해 내게 잘 전달되었을 것이다.

  나와 불교는 인연이 깊다. 종교로서 불교를 만난 것이 아니라 생활로서 불교를 만난 것은 나에게 큰 행운이었다. 어린 시절 바로 집 앞에 작은 포교당이 있었고 거기 계셨던 세분의 젊은 수행자들은 내 삶에 깊은 감명과 깨우침을 주었고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상태이다. 세 분의 젊은 수행자들은 지금, 한국 불교의 큰 나무로 가지를 뻗으셔서 그 그늘이 매우 그윽하고 넓다. 그 분들의 가르침은 경전과 신앙의 강요가 아닌 수행자로서 수행과 보시의 모습을 통해서 어린 나에게 매우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어쨌거나 정태춘의 노래는 불교적인 색채로 특별한 첫인상을 주었다. 물론 그 뒤 ‘촛불’이나 ‘서해에서’는 한없는 가슴 울림으로 내 20대 전체에 큰 영향을 주었고 1985년에 발표된 ‘북한강에서’의 그 몽환적 기타소리는 오십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나의 마음을 흔든다. 더욱이 그 노랫말 한 줄 한 줄마다 뿜어져 나오는 느낌은 어떤 시인의 시 보다도 더 서정적이며 동시에 철학적이다.

강물 속으로 또 강물이 흐르고

내 마음속에 또 내가 부딪히며 흘러가오.

강가에는 안개가 가득 피어나오.(‘북한강에서’ 노랫말 일부)

1984년에 발표된 ‘사랑하는 이에게’는 지금의 아내와 결혼에 이르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된 노래였고 1985년에 나온 ‘봉숭아’ 역시 나와 아내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전해주는 중요한 도구로 기억된다.

역사의 현장에서 그의 노래를 만나다.

2003년에야 비로소 정규앨범으로 나온 1980년대 후반부의 그의 노래는 역사와 민족과 자유와 평화에 대한 우리 모두의 열망을 녹여낸 것들이었다. ‘아 대한민국’은 당시 유행하는 비슷한 제목의 노래를 빗대어 부른 당시 정태춘 음악의 백미다. 시대를 향해, 역사를 향해 조용하지만 뚜렷하게 외치는 그의 목소리는 억압된 당시 우리들의 삶에 분노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떠나는 자들의 서울’로부터 ‘우리들의 죽음’은 당시 도시 빈민의 삶을 강하게 비판한 음악이었고 ‘인사동’은 서서히 천민자본주의에 의해 지배당하는 우리의 문화를 비판했고 ‘버섯구름의 노래’에서는 핵전쟁의 위협을 경고한다. 그는 이 지점의 노래를 통해 그가 가수로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투사로서의 모습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그를 통해 나는 그 시절의 암울함을 견뎌낼 수 있었으리라.

 그 후, 그는 다시 변화를 시도한다. 이제 그의 시선은 우리 삶의 출발점으로부터 더 커지고 넓어진 시선으로 세상을 노래하고 있다. 1988년에 발표된 무진 새 노래는 이전의 혼란스럽고 비관적 시선으로부터 좀 더 단정해지고 스스로 깊어진 모습을 보여준다.

  그 처음이 ‘실향가’이다. 처음으로 되돌아가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에너지를 얻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서의 ‘고향’ 노래는 ‘고향집 가세’에서 절정을 이룬다. 특히 첫 부분의 워낭소리는 압권이다. 그리고 무반주로 부르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에서 그의 통일에 대한 진정성을 엿볼 수 있다. ‘애기2’는 서사시에 가깝다. 교사인 나는 이 노랫말이 너무나 좋아 당시 나의 학생들에게 알려주고 싶어 졸업하는 아이들에게 복사된 가사를 나눠 준적도 있었다.

주변의 모든 것에 눈뜨던 시절

진실을 알고자 난 헤매였네.

귀를 열고, 눈을 똑바로 뜨고

어설프게나마 나는 듣고 보았네

영웅이 부르는 압제의 노래와

젖은 논 벼 베는 농부의 발자욱

빛바랜 병풍과 무너진 성황당

내 겨레 고난의 반도땅 속앓이를 (‘애기 2’ 노랫말 일부)

   그 뒤 거의 십 년 동안 그는 목소리를 멈추더니 1998년 ‘정동진/건너간다’로 우리 앞에 홀연히 나타났다. ‘5.18’에서 그는 광주를 진혼한다. 붉은 피와 튤립, 훈장을 통해 잘 못 흐르고 있는 역사의 강물을 그저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는 자신과 우리들 모두에게 잊지 말아야 한다고 노래한다.

  이 앨범 속에 있는 ‘정동진’은 그 뒤 2002년에 나온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의 ‘정동진 3’을 위한 준비였다. ‘정동진 3’은 이제 그의 시선이 이 나라의 문제에서 세계의 구조적 문제로 심화 확산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미국이라는 절대 강국에서 고통 받고 신음하는 사람들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이를 먹는 것에 대한 충분한 책임을 다한다는 것은 바로 이처럼 시선을 넓히고 깊어지는 일이리라. 2002년 앨범은 그 외에도 중국의 연변과 우리나라의 도시빈민 그리고 중산층의 샐러리맨들의 삶까지 매우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노래했다.

 2003년에 발매된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정태춘의 노래가 좀 더 정태춘 다워지고 마침내 정태춘이라는 분명하고 확실한 아이덴티티를 보여준다.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는 이 앨범의 대표곡 중의 하나인데 노랫말이 참으로 비장하며 동시에 뼈아프다. 지하철을 중요한 모티브로 삼은 이 노래의 노랫말을 보자.

창백한 그 불빛 아래 겹겹이 서로 몸 부대끼며

사람의 슬픔이라는 것이 다른 그 무엇이 아니구나!

우리가 이렇게 돌아가는 곳도

이 열차의 또 다른 칸은 아닌가!

아, 그 눈빛들 어루만지는 그 손길들(‘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노랫말 일부)

  우리는 누구인가? 그리고 우리는 과연 어디로 가는가? 삶의 본질적인 문제에 해당하는 이러한 질문을 그는 그의 노래에서 이렇게 풀어낸다.

열차가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찬란한 햇빛 세상으로

거기 사람들 얼굴마다 삶의 기쁨과 긍지가 충만한

살 만한 인생, 그 아름다운 사람들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노랫말 일부)

  그는 위대한 석학도 아니고 철저한 이론가는 더더욱 아니다. 시대를 관통하는 이 노랫말을 지은 그는 여전히 가수이고 아마 앞으로도 가수일 것이다. 그가 정치를 한다거나 그가 사회운동가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직 듣지 못했다. 수많은 미사여구를 쏟아내며 제 모습 알리기에 열중하는 저자거리의 시정잡배들과 비교해보면 그의 시선과 생각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2000년대 초입의 우리 삶의 풍경은 사실 그러했다. 이제 투쟁의 깃발은 내려졌고 더 이상의 외침도 없는 시대에 당도한 우리는 몹시 혼란스럽고 당황해했다. 그런 시점에 그의 노래 ‘92 장마, 종로에서’는 우리에게 그나마 위안이었고 한편으로는 다시 삶의 자리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시는

다시는 시청 광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말자

물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

절망으로 무너진 가슴들

이제 다시 일어서고 있구나.(‘92년 장마, 종로에서’ 노랫말 일부)  

다시 일어서서 가야 할 길은 이 땅의 통일, 평등과 자유, 그리고 진정한 민주화를 위한 길임을 노래하고 있다. 그 노래를 부른 이후 그는 다시 문을 걸고 소리를 멈추었다. 다시는 노래하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도 들렸다. 그런 그가 이해되기도 했다. 다시 노래를 부른다면 그의 노래는 어떤 모습일까에 대해서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오래 무던히 나는 그의 노래를 기다렸다. 마침내 거의 10년이 지난 2012년에야 비로소 그의 음악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 깔끔하지도 않고 세련되지도 않다. 약간은 불투명하고 약간은 어둡다. 어쩌면 이것이 2012년 현재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정태춘의 생각을 이 앨범표지로 읽을 수 있다.

 낮아지고 단단해진 그러나 아름다운 노래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

그의 아내는 박은옥이다. 정태춘과 결혼하면서 그의 삶을 지지하는 중요한 사람이 되어 그의 앨범에서 때로는 배경노래(백 보컬)를 제공하는 사람으로 또 때로는 곡의 일부를 부르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물론 정태춘 역시 아내의 노래에 그렇게 등장한다. 이러한 지지와 성원은 이 부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삶의 길이다.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는 박은옥이 부르는 노래가 있고 그녀의 감성이 잘 녹아든 노래로 생각된다. 이번 앨범은 도시 빈민의 문제와 환경과 자연의 문제에 이르는 지난날의 시선으로부터 이제는 인간의 심연에 이르는 부드러운 은유와 빛나는 상징의 노래를 부른다.

‘서울역 이씨’의 노랫말을 보자.  

통곡 같은 기적소리도 없이 다만 조용히

어느 봄날 따사로운 햇살에 눈처럼

그 눈물처럼 사라져 주듯이

소문도 없이 사라져 주듯이(‘서울역 이씨’ 노랫말 일부) 

이미 우리의 현실이 된 양극화의 짙은 그림자를 그는 이렇게 노래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우리가 보지 않으려 하는 것들을 그는 그의 노래로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날자 오리 배’는 지난 날 그의 노래 ‘정동진 3’이 동쪽으로 나아간 세계였다면 지금의 노래는 서쪽으로 나아감을 보여준다. 그의 지평이 방향의 균형을 이뤄 넓어지고 있음이며 동시에 그의 낮은 목소리는 조용조용하게 세상 모든 곳으로 흐른다. 영종도를 지나 단둥으로 그리고 바이칼을 지나 에게 해로 퍼져나가는 그의 시선은 마침내 아프리카 탕가니카 호에 이른다.

 그 여정에서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의 상처를 보듬고 부드러운 감성으로 나아가는 그의 목소리는 아프리카 서쪽 면을 지나 남아메리카 티티카카 호에 도착한다. 내가 사는 이 시대에 어떤 노래 중에도 이렇게 세상을 돌며 그 아픔과 서정을 보듬어 노래로 부른 사람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그의 이런 작업은 그의 세상에 대한 문제의식이 여전히 날카롭고 단단해서 어떤 와류에도 쉽게 흐트러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들 또, 아프리카 호숫가 작은 샛강에 내려 거대한 일출을 보리라

주린 채 잠들지 않고 총성에 그 잠 깨지 않고 아이들, 새벽 강물을 마시리라

늙은 기린들도 뚜벅뚜벅 그 물 가로 모이고 밀림의 새들은 날고

세계 어디에도 이들보다 흠, 덜 행복한 사람들은 없으리라(‘날자, 오리배’ 노랫말 일부)

50대 후반인 그의 목소리는 이제 많이 굵어졌고 음률의 고저와 장단보다는 음률위에 그저 조용히 움직이고 있으며 음은 그를 거부하지도 않고 그도 음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구불구불 그렇게 흐르고 있다. 폭발하는 고음도 빛나는 절정도 없지만 노래는 그저 담담하게 나를 거쳐 공기 속으로 스며 들 뿐이다.

<김 선생의 오솔길>은 현현적적 시민기자가 클래식 평론, 영화 평론, 책 평론 등으로 세상읽기를 하는 공간입니다. 현현적적은 곤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김준식 교사의 필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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