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대 영문과 대학원을 접었습니다.

많은 반대와 어려움을 견뎌내고 입학한 그 곳을 포기한 것에는 한 가지의 기억과 다른 하나의 꿈인듯 환상인 듯 한 최근의 경험이 있었습니다.

1997년 어느 봄, 아버지는 평소에 앓으시던 간경화의 합병증으로 부산 복음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갓 대학을 졸업하고 아버지를 돕던 저는 그 날 밤 아버지와 한 병실에 있었습니다.

평소에 아버지와의 관계가 그리 가깝지 않던 장남으로서의 저는 왠지 그 날 아버지께 맛있는 것이라도 대접하고파서 자갈치 시장을 찾아 아나고 회를 조금 준비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맛있게 드시고 다음 날 드시겠다고 냉장고에 남은 음식을 넣어 두셨습니다.

그 날 밤,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꾸준히 읽어오던 영어신문을 펴고 해독에 들어갔습니다.

한참을 지났을까 아버지께서는 어지러움과 구토증을 호소하셨습니다.

어지러움과 구토증이 뇌 혈관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그 때는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저는 간호사 실에 가서 아버님이 저녁에 아나고 회를 드시고 체하셨는지 어지럼증과 구토를 느끼신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간호사들은 인상을 좀 쓰다가 방에 들어왔다 갔었는 지, 그냥 무시하였는 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 후로 잠시 더 영자신문과 씨름하던 저는 그대로 잠이 들었습니다.

한참을 괴로웠을 텐데, 제가 그렇게도 부담스러우셨을까요.. 잠든 저를 깨우는 대신 아버님은 진주에 계시던 새어머니에게 전화하는 길을 택하셨나 봅니다.

다음 아침 나절에 소란함을 느낀 제가 일어났을 때에는 이미 많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아버님의 병상에서 바삐 움직이고 계셨고 아버지는 의식을 회복하시지 못하셨고 중환자실에 옮긴 후 얼마 되지 않아 스스로 호흡이 힘드시게 되어 응급차로 집으로 모셔서 사망진단을 받으셨습니다.

그 날 밤 그렇게 열심히 읽었던 영자신문에 대체 어떤 의미 있는 일들이 있었을까요, 그저 어느 나라 정치 이야기나 패션 이야기가 고작이었을 것입니다.

결코 아버지와의 마지막 밤을 헌납할 만큼의 그 어떤 의미도 지금 기억할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한 자락 자랑할 수 있는 단어 몇 개일 뿐이었지요.

 

그래서,

대학원 생활 한 달 동안 틈틈히 전화할 때마다 전해지는 아내의 풀이 죽은 목소리, 가라앉은 톤을 들을 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공부가 진정으로 누구를 위한 것일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꿈인 듯 환상인 듯 한 가지를 겪었습니다.

두 사람이 누울 수 있을 만한 침대인 듯 방인 듯 한 곳에서 저는 둘둘 말린 이불 한 자락을 보았습니다.

있어야 할 아내가 보이지 않아 저는 그 이불을 응시했습니다.

이불 귀퉁이가 크리스마스 트리의 불처럼 깜박깜박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깜박이는 이불을 건드리니 그 말린 이불이 펴지면서 아내의 얼굴이 잠깐 보였습니다. 어깨와 팔과 허리와 다리가 보였고, 아내가 잠시 잠이 드는 듯 가느다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아내가 이불을 말아 감고는 한바퀴 구르고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아~ 아내는 그렇게 잠시 나와 함께 있다가 영원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 한 때가 결코 길지 않은데, 나는 도대체 거기서 무얼 하고 있었던 걸까요?

나의 이 공허한 지식욕을 따라서 나는 무엇을 연구하고 있었던 걸까요?

Semantics? Syntax?

아내의 꿈은 나를 향해 있었습니다.

나는 아내의 꿈이고 아내는 나의 꿈일 수 있는 데도...

그 날 밤 내가 아버지를 외면한 것처럼 나는 아내를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나만이 꾸는 꿈을 접으려고 합니다.

만약 내가 다시 꿈을 꾼다면 그것은 아내를 통해서 아내의 꿈을 통해서 세상을 사랑하는 꿈을 꿀 것입니다.

한 사람을 천하보다 사랑하는 것, 바로 그 사람 속에서 천하를 새로 발견하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다시 공부를 시작한다면, 그것은 지금 나의 아내와 다른 사랑하는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진리가 아니라, 지금 내 삶속에 녹아있는 바로 그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세상사람 모두다 사라진 바위섬에 파도가 부서지며 부르는 노래가 한 참을 이 땅에 울린다고 해도 결코 외롭지 않을 삶의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그것이 진정 나 음미하는 삶이 세상에서 가져갈 수 있는 하나뿐인 기억이라 해도 아깝지 않을 그런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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