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토 한센인 학살사건'을 다시 본다

 

▲ 한센인 학살사건 현장. 1957년 당시 14살 소년이었던 비토리 주민 최규용(70) 씨가 현장에서 그날의 기억을 더듬고 있다.

경남 사천시 서포면 비토리. 섬의 모양이 날아가는 토끼를 닮아 이름 지어졌다는 이 섬은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바다의 우유라 불리는 ‘굴’로 유명하다. 최근에는 이 비토가 고대소설 ‘별주부전’의 고향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짐으로써 관광단지로 거듭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렇듯 겉보기엔 한없이 소박하고 평화로운 섬 비토. 그러나 50여 년 전, 이 섬에서 상상하기 힘들만큼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음을 아는 이는 드물다. 수 십 명이 죽창에 찔리고 돌에 맞고 불에 타 죽거나 다친 사건. 그것도 경찰의 방관 아래 민간인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이어서 더욱 충격적이다.

그 아픈 역사를 따라 시간을 거슬러 가보자. 사건의 개요는 국가인권위원회가 2005년에 조사해 발표한 ‘한센인 인권 실태조사’ 보고서 중 한센인 집단학살 사례로 언급된 ‘사천 비토리사건’의 내용 일부를 옮기는 것으로 대신한다.

“1957년 8월. 삼천포 영복원에 살던 한센인들이 농토를 확보하기 위하여 사천 서포면의 비토리 섬에 건너가 개간을 하고 있던 중, 비토리 및 서포면 주민들과 충돌하여 환자들이 집단으로 학살된 사건이다. 주민들은 한센인들이 철수 약속을 이행하지 않아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주장하고 한센인들은 철수준비를 하고 있던 상황에서 기습적인 공격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몇 차례의 협상과 갈등이 반복되는 가운데, 1957년 8월 28일, 주민 약 1백여 명에 의해 나병병력자 30여 명이 살해되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

참고할 사항은 당시 목숨을 잃은 한센인 희생자가 몇 명이었는지는 아직 정확치 않다는 점이다. 각종 증언과 자료 등에 따르면 최소 26명 이상임은 확실하다.

 

▲ 하늘에서 본 비토섬. 사진 한 가운데 보이는 곳이 하봉으로 학살사건 현장이다.

국가인권위의 한센인보고서 중 ‘비토리사건’의 상당부분은 사건 발생 직후 국회조사단(단장 정준모 의원)에서 현장조사 뒤 작성한 ‘나환자와 경남 사천군 비토리 주민과의 충돌사고 조사보고서’를 참고한 것인데, 여기에 담긴 사건일지는 다음과 같다.

 

1950년부터 (영복원)비토섬 이주계획
1956년 11월 농림부장관의 귀속임야 임대방침에 따라 비토섬의 귀속임야 22정보 임차를 위한 수속 시작
1957년 7월 12일 경남도에 접수하였으나 각하
8월 7일 삼천포시장, 농업은행 삼천포지점장, 영복원장이 삼천포경찰서장을 방문하여 (비토리 입주에 대해)협조요청, 합법적 행위에 대해 협조의사를 밝힘
8월 8일 병력자 36명 입도, 9일 퇴거
8월 16일 (정봉성)원장과 (허판개)총무부장이 서포지서, 삼천포경찰서에 8월 19일 입도 예고
8월 22일 입도 후 개간착수
8월 24일 서포지서로부터 원 대표 출두요청, 서포면장실에서 27일까지 퇴거를 약속
8월 27일 현지 경찰이 퇴거약속 준수를 요구하며 공포 발사. 비토리섬 주민은 굴양식장 기대 무산 우려, 전염위험 및 토지 상실 우려
8월 28일 비토리 및 서포면민 100여 명이 저항능력이 없는 환자 68명을 공격, 22명 현장 사망, 2명 행방불명, 중상자 33명, 경상자 23명, 중상자 중 2명(국가인권위 보고서에는 ‘1명’으로 잘못 표기됨) 사망

그리고 아래는 영복원 측에서 밝힌 희생자 명단으로 모두 27명이다.

최자경, 박종식, 이대식, 주또준, 이만춘, 이봉춘, 정치일, 김영호, 김권호, 김도용, 조덕상, 김영식, 김성덕, 이종태, 김쌍이, 김영수, 윤한옥, 황상백, 배정실, 한종문, 강양구, 김연실, 김형모, 김재경, 김정환, 이필남, 신원미상 1인.

 

▲ 영복원. 멀리 바다 건너 보이는 섬이 비토리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비토리 한센인 학살 사건’은 한센인 집단정착촌 영복원 마을주민들이 비토섬 일부를 개간하던 중 전염확산과 생존권 위협 등을 이유로 비토주민들이 이들을 공격함으로써 큰 희생을 낳은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당시 언론에서 대서특필 하면서 사회문제화 되었다. 그러나 사건 관련자들의 처벌이나 징계 등이 오늘날 눈높이로 보면 ‘솜방망이’ 수준이었음에도 시대적 분위기 탓인지 곧 가라앉았다. 희생당한 영복원 쪽이나 가해자인 비토리 쪽 주민들 모두 이와 관련한 얘기를 철저히 금기시 하면서, 사천 지역사회에서도 이 사건은 점점 잊혀갔다.

개척지가 필요했던 영복원, 굴 양식 기대했던 비토주민

비토리사건을 되돌아봄에 있어 영복원이 어떤 곳인지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당시 국회조사보고서에는 한센인 집단정착촌(당시에는 ‘나환자 수용소’로 불림) 영복원이 1950년에 설립한 것으로 돼 있으나, 실제는 1949년에 들어섰다. 전남 소록도와 여수 애양원 등지에서 완치된 몸으로 살 길을 찾아 모여든 사람들이 주를 이뤘다.

위치는 사천시 실안동 산3번지 일대로, 산분령 아래에 바다를 끼고 있다. 처음에는 몇 가구 되지 않았지만 주민이 점점 늘었고, 특히 전쟁을 겪으면서 피난 온 한센인들이 급격히 늘었다. 그 결과 사건이 발생한 1957년에는 주민 수가 300명 가까이 이르렀다. 원장은 기독교 장로인 정봉성 씨가 맡고 있었다.

 

▲ 한센인들이 개척하려 했던 땅은 영복원에서 바닷길로 4킬로미터쯤 떨어진 비토리 하봉이었다.

재산으로 대지 2080평(도량형 표기를 당시 기록으로 함), 임야 10여 정보, 답 7000평, 전 9000평이 있었다. 그러나 쌀과 약품 등을 구호에 의존하는 비율이 높았다고 한다.

 

인구는 늘고, 땅은 비좁고. 이들에겐 새로운 개척지가 필요했다. 그래서 눈길을 돌린 곳이 영복원 맞은편, 4㎞ 바다 건너 보이는 비토섬이었다. 이들이 비토섬을 개척지로 삼은 이유는 그곳에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들이 경영하던 과수원과 농장이 있었고, 이후 이 땅이 국유화 됐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복원이 개척하려 했던 비토섬은 어떤 곳일까? 당시 사천군 서포면에 속했던 비토섬에는 123가구에 815명이 살고 있었다. 주민들은 반농반어 형태로 생활했는데, 1952년부터 중앙수산시험장에서 굴양식시험장소로 선정돼 국고를 보조받고 있었다. 하필이면 이 굴양식장이 영복원에서 임차해 개간하려던 땅 바로 앞에 있었던 것이다.

하봉이라 불리는 이곳은 비토섬 중에서도 동쪽 끝으로, 본 마을에서는 수 킬로미터 이상 떨어졌다. 또 당시에는 민가가 3채뿐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영복원에서는 마을과 멀리 떨어졌기에 비토주민들의 반발이 그리 크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마침 1956년 11월경 농림부장관의 ‘귀속임야 임대’ 방침이 내려지자 영복원은 비토리 귀속임야 22정보를 임차하겠다는 뜻을 경남도에 전달한다. 하지만 경남도는 이듬해 7월 12일, 임차주의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이들의 주장을 각하했다.

그럼에도 영복원에서는 비토섬 개간을 강행하는데, 8월 8일에는 36명이 건너갔다가 현지 경찰과 섬주민의 강경한 반대로 이튿날 물러난다. 이들은 19일 다시 들어가겠노라 예고했으나 태풍이 몰아쳐 뒤로 미뤄야 했다.

 

▲ 비토섬에서 하봉으로 건너가는 길목. 당시 비토의 큰 마을은 하봉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하봉으로 건너가려면 뱃길 외에는 이 길이 유일했다. 비토리 한 주민은 사건 당시 이곳에 철조망 같은 것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주민들은 이를 영복원 측에서 설치했다고 보고 더욱 분노했다고 한다.

영복원 주민들이 다시 비토섬에 들어간 것은 8월 22일이었다. 당시의 상황은 고 김병련 목사(경북 청도 명진교회)가 쓴 ‘하늘도 눈을 가린 참극, 비토리사건을 증언한다’에 잘 담겨 있다. 이 글은 비토리사건 발생 28년이 지난 뒤에 고 김 목사가 영복원을 찾아 생존자들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기록한 것이다.

 

“개간선발대가 조직되고, 제일진이 원생들의 환송을 받으면서 비토리 섬을 향하여 의기양양하게 첫 출발을 하게 되었다. 이날의 환송식은 이때까지 없었던 보기 드문 행사로 모두들 축제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사랑하는 처자식들이 뱃전까지 따라 나와 손을 흔들며 얼마 동안의 나누임을 아쉽게 생각했으며, 개중에는 석별의 정을 못 잊어 눈물까지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섬에 도착한 선발대가 제일 먼저 한 것은 몇 개의 천막을 치고 취사장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땅을 일구기 시작했다. 일본인 철수 이후 12년간 버려졌던 땅을 개간하는 데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서포경찰과 주민, "27일까지 섬을 떠나라"

그러나 이때부터 비토주민들이 본격적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한센인들로 인해 병이 전염될까도 염려스러웠고, 기대를 걸고 있던 양식 굴을 비롯해 각종 해산물의 판로가 막힐 것이라고 걱정했다. 일부 그런 현상이 이미 발생하고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나아가 '비토섬 전체를 한센인들에게 내어주고 쫓겨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개척단이 섬에 들어간 지 이틀 되던 24일, 서포지서의 출두 요청에 따라 영복원 대표단이 서포면장실을 방문했다. 여기서 대표단은 자신들이 모두 음성환자들임을 강조하며 전염 가능성이 없다고 강조한다. 또 비토리에 눌러 살려는 게 아니라 땅 개간을 통해 농장만 경영하려는 것이라며 비토주민들을 설득한다.

 

▲ 비토리는 사건 발생 당시 정부 지원을 받아 굴 양식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사건현장 앞바다 굴 양식장.

하지만 비토주민들은 꿈쩍하지 않은 모양이다. 오히려 “빠른 시일 안에 철거하라. 그렇지 않으면 모조리 불태워 버리겠다”며 으름장을 놓았음을 앞선 김 목사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약속한 27일이 되자 현지 경찰이 몇몇 비토주민들과 함께 개간 현장을 찾았다. 경찰은 다시 한 번 퇴거할 것을 요구했고, 공포까지 쏘며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음을 상기시키고는 떠났다.

이날 밤 한센인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밤에 기습을 해서 막사를 불태워 버리겠다거나 배를 뒤집어 버리겠다는 식의 끔찍한 소문들이 끊임없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당장 떠나지도 못했다. 개간해 놓은 땅도 아까웠고, 무엇보다 '설마 그렇게야 할까' 했던 것이다.

그 시간 비토주민들은 "죽기 아니면 살기"라며 전의를 다지고 있었다. 행정이나 관만 믿고 있다간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빼앗길 수 있다는 위기감의 발로였다. 그리고 비토주민들만으론 세가 부족하다고 판단, 인근 자혜, 다평, 선전 마을에 지원도 요청했다. 다음날 모일 때는 죽창 등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챙기자는 다짐도 잊지 않았다.

피로 물든 8월 28일.. 최소 26명 사망, 56명 중경상

드디어 28일, 운명의 해가 밝았다. 영복원 개척단은 여느 때처럼 돌을 주워내고, 나무뿌리를 캐내며 밭을 일구고 있었다. 주위는 잠잠했지만 뭔가 일이 날 것만 같은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는 게 생존자들의 증언이다.

정오 무렵, 비토와 인근 마을주민들이 하봉 언덕 위에 올라섰다. 그 인원이 얼마였는지는 증언과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합치면 200명은 족히 넘었을 것으로 보인다. 남자들은 죽창을 들었고, 부녀자는 돌멩이를 나르기 위한 대야나 바구니를 들었다.

 

▲ 당시 한센인들이 모여 있던 곳에서 바깥을 향해 바라본 모습. 좁은 길 양쪽은 경사가 급해 쉽게 오르지 못한다.

개척단 즉 한센인들은 천막이 있는 쪽으로 급히 물러났고, 70~80m를 둔 대치가 잠시 이어졌다. 말싸움이 끝나고 곧 투석전이 시작됐다. 비토주민들은 언덕위에 있었고, 인원도 훨씬 많았다. 반면 한센인들은 낮은 곳에 있었다. 그런데다 손이 성한 사람도 많지 않아 멀리까지 날아가는 돌은 드물었다. 사태악화를 직감한 일부는 싸움을 말렸으나,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어느 정도 대응한 모양이다.

 

그러자 부상자가 속출했다. 그 중 다수는 한센인들이었으나 비토주민들 중에도 피를 흘리는 사람이 발생했다. 분위기가 더욱 험악해질 무렵 경찰이 나섰다. 공포를 쏘며 강제 해산에 나선 것이다.

비토주민들은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는 다시 대책회의를 가졌다. 상대가 수적으로는 적다고 하나 전면전을 벌일 경우 마을주민들의 피해도 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결국 썰물을 기다렸다가 양쪽 해안을 이용해 세 방향에서 압박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참고로 당시 개척단이 머물던 곳은 삼면이 바다였다. 이곳으로 접근하려면 잘록한 ‘목’을 지나야 했는데, 그 폭이 겨우 5~6미터 정도였다. 개척단으로서는 효율적인 방어를 할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바닷물이 완전히 빠지면 그땐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이었다.

한편 주민들이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서포지서장이 현장을 둘러봤다는 증언도 있다. 당시 14세 소년이었던 최규용(70) 씨는 이날 있었던 일을 비교적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서포지서장(=주임)이 오후 4~5시 경에 현장을 둘러보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최 씨는 또 한센인 가운데 서포가 고향인 한 남성과 그의 두 부인에게 미리 귀띔해 주어 미리 그 자리를 뜨도록 했다는 새로운 사실도 들려줬다. 개척단을 향한 공격이 초읽기에 들어갔음이다.

 

▲ 비토주민들은 당시 바닷물이 최대한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해안을 통해 한센인들에게 다가갔다. 사건 발생 후, 왼쪽 아래 동백나무숲이 우거진 곳에서 시신들을 화장했다고 한다.

천막에 갇힌 한센인들에 죽창 세례 뒤 불 질러

 

비토주민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인 것은 경찰이 돌아간 뒤 해가 뉘엿해질 때쯤이다. 비토주민들은 징을 울리며 일제히 공격했다. 한센인들은 돌을 던지며 최대한 저항했지만 오래 버티지 못했다. 해안을 통한 마을주민의 세 방향 압박이 효과를 거둔 셈이었다.

이에 당시 영복원 총무로서 개척단을 이끌던 허판개 씨가 사실상 항복을 선언한다. 가능한 빨리 섬을 떠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그러나 비토주민들의 기세는 누그러들 줄 몰랐다. 전날 밤 끝장을 보기로 의견을 모았고, 그 결의는 여전히 유효한 듯했다. 이들의 마음은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이었다.

한센인들은 더 이상 맞서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천막 속으로 몸을 피했다. 그들은 이제 ‘독 안에 든 쥐’였다.

그럼에도 주민들의 공세는 끝나지 않았다. 천막을 무너뜨렸고, 무방비 상태의 한센인들에게 죽창과 몽둥이질이 이어졌다. 괭이와 삽도 이용됐다. 천막 속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 한센인들은 마을주민들의 공격을 피해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온전히 몸을 숨길 수는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누군가 천막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질렀다. 화염을 피해 뛰쳐나오는 한센인들을 기다린 것은 역시 죽창과 몽둥이질. 용케 바닷물까지 뛰어든 사람도 멀리 도망가지 못했다. 주민들이 배를 타고 뒤쫓아 왔기 때문이다. 곳곳에 숨어 있던 한센인들도 붙잡혀 포박된 채 죽임을 당했다.

 

살육의 시간은 두 시간 정도 이어졌다. 그 사이,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경찰은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비토주민들은 그제야 뿔뿔이 흩어졌고, 살아남은 몇몇 한센인들은 경찰마저 어떻게 나올지 몰라 한참을 더 숨죽이고 있어야 했다.

이 사건으로 22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2명이 행방불명(바다 투척) 됐으며, 중상자 33명, 경상자 23명이 발생했다. 그리고 중상자 가운데 2명은 치료 중 숨졌다는 게 당시 국회의 조사보고서에 담겨 있다. 그러나 사망자가 27명 또는 28명이라는 기록과 증언이 있어, 추가 사망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8.28 비토리 한센인 학살사건, 어떻게 마무리 됐나?

사건 발생 당일 밤, 삼천포경찰서는 밤10시 경 비토초등학교에 수사본부를 차리고 비토리 마을이장과 9명의 반장 등을 불러 사건 경위 파악에 들어갔다. 그 결과 84명이 한센인 살해에 직접 가담했다고 보고 집중 조사했다.

 

▲ 이날의 대치와 학살은 어둠이 내려 앉을 쯤 되어서야 끝났다.

사건 발생 이튿날, 시신과 부상자를 나누어 숨이 붙어 있는 사람은 영복원으로 옮겼다. 당시 심한 화상과 곳곳에 골절상을 입었던 정계현 씨는 의식을 잃어 숨진 것으로 간주됐으나 화장 직전에 살아 있음이 확인 돼 목숨을 건졌다. 그는 의식불명 4일 만에 깨어났다.

 

환자들을 치료한 사람들은 여수 애양원과 대구 애락원 등 한센인 보호시설에 있던 의료인력들이었다. 소록도에서도 의약품과 구호품을 가지고 의사와 간호사가 다녀갔다는 기록도 있다.

시신은 사건현장 근처 해안에서 하루나 이틀 뒤 화장됐다. 화장은 비토마을주민이 맡았다고 한다. 그러나 시신이 여럿인 데 비해 기름과 장작이 부족해 화장에 애를 먹었다는 후문이다. 숨진 한센인들은 백골로 변하고서야 영복원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8월 31일에는 이들에 대한 위령제가 사천 합동군민장으로 거행됐다.

반면 경찰당국은 비토리 사건으로 전국의 다른 한센인들이 집단행동에 나서지 않을까 염려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사건 발생 다음날인 29일, 경남전역에 비상경계태세를 발령하고 일정기간 유지했다. 당시 부산경남지역에는 7000여 명의 한센인이 20개 시설에 나뉘어 있었다.

 

▲ 폐교된 비토초등학교 모습. 사건 발생 직후 임시 수사본부가 차려졌던 곳이다.

이 사건으로 삼천포경찰서장과 서포지서주임이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파면됐고, 영복원의 정봉성 원장도 한센인들을 부추겼다는 이유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하지만 한센인들은 그가 죄가 없음을 주장하며 석방을 요구했다. 이 일로 정 원장이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는 이듬해 말 사천의 여러 인사들을 조직해 영복원을 법인화 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한센인 학살을 주도했던 비토주민들은 1심에서 5명이 징역3년, 6명이 징역2년, 32명이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2심과 3심에 이르는 과정에서 형량이 상당히 줄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고 김병련 목사는 “주동자 중 3명만 3년 내지 2년의 체형이 언도될 뿐, 그 외는 모두 집행유예로 나오고 말았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밖에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모두 풀려났다”는 비토주민 증언도 있어, 가해자에 대한 처벌 내용은 좀 더 확인이 필요하다. 한편 재판 과정에서 피의자 임아무개 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학살 책임은 누구에게..?

이 사건을 조사한 국회조사단은 조사보고서에서, 경찰의 퇴거 지시를 따르지 않은 점 등은 영복원의 잘못으로 인정하면서도, 비토주민들의 살인 행위에 대해서는 “상상할 수 없는 천인공노할 범죄행위”라고 규정하며 엄한 처벌을 요구했다.

 

▲ 비토리 학살사건 현장 너머로 멀리 보이는 곳이 영복원이다. 개척의 꿈을 품고 건너온 한센인 수십명이 백골로 변해 돌아갔다.

또 행정당국과 치안책임을 가진 경찰에도 책임을 물었다. 특히 서포지서에 6명의 경찰관이 배치돼 있었음에도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에 현장에 있지 않았고, 사태수습에 있어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국회조사단은 보고서 말미에서 “국내에 산재한 4만여 나환자에 대한 항구적 대책이 시급히 수립되어 보건상은 물론 사회문제화한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강구 실천하라”고 정부에 촉구했다.


*이 취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 사업비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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