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which beyond a pain and the cure.

고통과 그 치유를 넘어서는 삶.
Life which beyond a pain and the cure.

삶이 고통과 그 치유일 뿐이라면...

혹시 삶은 고통과 치유의 반복일 뿐일까?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의미도 없는 것이 삶이라면.. 그것을 진지하고 열심히 사는 이들은 결국 조롱거리 일 뿐이리라.


혹은 모든 사람들이 같은 이유와 목적, 의미를 위해 사는 것이라고 누군가 가르친다면 그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나 이외의 다른 누구에게라도 나처럼 살라고 가르치지 못한다. 그것은 그에게도 나에게도 너무나 고통스럽고 무익한 올무이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똑 같은 시험이나 고통이 다가오더라도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치유를 가지고 있다. 그 치유는 창조적이고 독특하며 그 사람의 인품을 나름대로 조성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 치유를 알게 된다면, 머리로서가 아닌 온 몸으로 체험하게 된다면 그 다음은 무엇일까?
(단지 나의 경우일 뿐이나 아래와 같은 유익이 있었다.)

첫째로, 기쁨에 너무 도취되지 않는다.

기쁨에는 이유와 댓가가 있고, 설령 내가 공짜로 이 기쁨을 누리는 것 같아도, 실은 나 자신 혹은 누군가 나를 사랑하는 존재의 고통에 (설령 그것을 고통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맺힌 열매이기 때문이다.

절제 안에서 누리는 그 기쁨이 진정한 기쁨의 맛이다.


둘째로, 나와 다르다 하더라도 그를 판단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를 숭배하지도 않고 깔보지도 않고 그의 행동과 외모가 나름대로 의미가 있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 이를 자신의 잣대로 재거나 가르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시도들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기자가 계속 기사를 쓰는 이유는 하나의 말이 또 다른 부정이나 긍정의 여지를 남기게 되고, 마침표를 어디에다 찍어야 할 지 몰라 어영부영 하는 모습과 흡사하겠다.)


셋째는 독자들 자신에게 맡겼으면 한다.

자신과 자신이 알고 있는 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일 수 있게되면 삶은 무한한 도전과 기회를 우리에게 열어준다.

얼마나 삶이 가능과 불가능함으로 가득차 있는지..

자신의 가능성을 불가능의 감옥으로 죄고 있는 것은 당신 자신이 아닌지 돌아보았으면 한다.

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드려는 것처럼 보이는지..

이 모든 것을 풀어야 하는 것은 자신뿐임을... 불운하게보다는 자랑스럽게 여겨야 함을..


지금 이 삶이 바로 그 삶임을 항상 깨닳으며 살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어떤 이들에게는 고요한 시간에 잠에서 깨어 할 수 있는 가장 가치있는 일이 스스로와 주변과 모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노라 부끄럽게 돌아보며 글을 맺는다.

*이 기사는 경남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으로 원고료를 지급하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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