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책 제목이 내용과 주제를 압축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이 책의 제목은 그리 좋은 것은 아니다. 경제성장과 삶의 질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대한 성찰은 내용의 일부분일 뿐이며, 민주주의․전쟁․국가폭력과 같은 묵직한 주제들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적지 않은 페이지를 차지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 좋은 제목이 아닐지언정 나쁜 제목은 아니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는 ‘근대사회와 발전’이 우리에게 약속한 것들 - 경제적 풍요로움, 자유, 평화와 안정 등- 이 과연 실현되었는지, 이런식의 발전을 계속한다면 그러한 것들이 실현될 수 있을지를 성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자본주의 혹은 시장경제로 불리우는 이 체제가 보장하는 가장 확실한 것이 경제적 풍요로움이라고 보았을때 이 책의 제목은 내용과 주제를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이 책을 소개받고, 나중에서야 정독을 하게 되었다. 200페이지가 조금 넘는 이 책이 이렇게 풍요로운 성찰을 담고 있는 줄 알았다면 진작에 다 읽어보았을 터이다. 아마 이렇게 얇고 조그만 책이 제목처럼 무거운 주제를 충실하게 다룰 수 없을 것이라고, 얍잡아 본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페이지 수가 엄청난 두꺼운 책일수록 무언가 충실하고 진정성있는 내용이 들어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돈이 많은 사람일수록 그 삶의 질이 높고 행복할 것이라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선입견에 불과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한국 사회의 상당수 구성원들은 그런 선입견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난 17대 대선에서 1,2,3위로 득표한 후보들은 각각 이명박 7%, 정동영 6%, 문국현 8%의 경제성장 수치를 공약으로 제시한 사람들이었다. 17대 대선에서 적어도 유권자 다수의 욕망은 높은 경제성장율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4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저렇게 높은 경제성장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시기로 들어서 있다. 

"UN, 자원소비 줄여야" 대 "전력소비량 늘어 경기회복 증거".. 모순

그렇다면 한국 사회는 조금이라도 더 높은 경제성장율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여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일까? 만약 이 책의 저자가 위의 질문에 대답한다면 ‘그렇게 해서 삶이 풍요로워지고 행복해질까?’라고 되물어 보았을 것이다. 이 책의 내용들은 질문에 현명하게 대답할 수 있는 많은 근거들을 제시한다. 

우선 이 책의 시작은 심각한 환경위기와 경제성장의 현실주의로 시작을 한다. UN에 낸 보고서에 따르면 선진공업국들의 자원소비를 90%정도 줄여야 기후변화 및 석유고갈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다고 하는데, 신문에서는 이 보고서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기업체의 전력소비량이 전년보다 늘어나고 있으며 이는 경기회복의 증거라고 보도한다. 국제면의 UN보고서는 유토피아적인 꿈을 다룰 뿐이고, 경제면은 ‘현실주의’를 다룬다. 

한편,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일본에서 살고 있는 저자는 환경문제에 악영향을 끼치고, 경제성장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군비증강 및 상설군대화는 어떻게 ‘현실주의’로 포장되는지를 묻고 있다. 그는 근대사회 이후 등장한 정부의 군대가 타국의 군인 보다는 자국민을 더 많이 죽였으며, 타국의 군인과 전투하지는 않았으나 자국의 시위대에는 발포해 본 경험이 있는 군대가 적지 않게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현실주의적으로 봤을 때 그러한 군대는 국민들의 안전이 아니라 정권과 기득권층의 안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토록 우리의 현실주의는 매우 이중적이다. 인간이 쾌적하게 살아가고 후손들이 자라날 수 있는 자연환경을 관리하고 보존하는 국제협약은 유토피아적이지만, 인간을 죽이고 지구를 황폐화시키는 무기와 군사시설을 늘리는 것은 냉혹한 국제사회의 현실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중성은 군대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경제성장으로 파이가 커져야 나눠먹을 수 있는 크기도 커진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즉, 파이가 커질때까지 우리는 다소 불평등한 분배로 참고 열심히 일만 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묻는다. 전 지구적으로 경제규모는 계속해서 커지고 있는데, 제3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은 왜 커진 파이는 커녕, 기존의 먹던 파이를 그대로 유지하기에도 급급한 것이냐고. 

경제발전이 모두를 부유하게 하리란 가정은 그저 희망에 불과

그는 경제발전이 모두를 부유하게 만들 수 있다는 가정은 현실이 아니라 그저 희망에 불과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LA의 1인당 평균 에너지 소비율이 세계 전역으로 확산될 경우를 계산해 보면 지구가 다섯 개가 아니면 그런 생활은 성립이 안 된다는 연구결과가 있었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전 세계의 모든 가족이 자동차를 한 대씩 가진다고 하면 석유는 수개월에서 수년정도면 바로 고갈이 된다고 하는 계산을 내놓았다고 한다. 모두가 미국처럼 잘 사는 나라가 되고 싶어하지만 지구는 하나이고 미국인의 삶은 전 지구인에게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인들은 평균적으로 더 행복한가? 미국의 성인의 14%는 약병의 지시사항이나 신문을 못 읽는 문맹이고, 미국의 유아사망률은 훨씬 더 못 사는 쿠바보다 약간 높거나 비슷한 것이 현실이다. 1인당 평균 GDP로 따지면 미국은 쿠바보다 훨씬 더 행복해야 되지만 더 높은 문맹율과 유아사망율이 그것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저자는 <제로성장>을 주장하면서, 얼만큼 발전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풍요의 질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평균적으로 1인당 GDP가 얼마나 커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집 없이 거리를 떠도는 사람, 아픈 데도 병원비가 없어서 치료를 못 받는 사람이 전체 인구 중 얼만큼 적은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사회는 그런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 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직장이 있는 사람은 야근,특근에 시달리면서 여유시간이 없는데, 일자리가 없어서 고민하는 청년들이 넘쳐나는 이런 현실을 과연 경제성장이 해결할 수 있을까? 오히려 더 높은 경제성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다보니 생겨난 폐해가 아닐지 저자는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일과 소비에 중독된 것이 현대인이라고 말하면서, 공공의 문제를 놓고 고민하고 토론할 여유가 없는 국민이 다수인 사회가 과연 민주주의 사회라고 부를 수 있냐고 질문을 던진다. 그는 민주주의가 단순히 대표자를 잘 뽑는 선거제도가 전부인 것은 아니며, 그 사회의 구성원이 얼만큼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지, 그런 정치참여의 기회구조가 얼만큼 잘 보장되어 있나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일과 소비에 중독된 현대인들은 거창한 이념 문제뿐만 아니라 하천살리기, 나무심기 등 지역사회의 조그만 문제들에도 참여할 여유시간이 없으며, 교육 및 정치제도 역시 그를 무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일과 소비를 줄이고 나누며 이웃와 함께 하는 문화활동, 어려운 사람을 돕는 봉사활동, 인간 이외의 생물과 함께 하는 자연활동을 하는 여유시간을 늘려나가야면 진정한 풍요로움을 성취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그런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대표자를 잘 뽑는 대의민주주의가 아니라 참여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저자의 이런 주장을 유토피아적이라고, 그것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무시해 버릴 것인가? 오히려, 경제성장율이 높으면 여러 사회 갈등과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이야 말로 비현실적인 것이 아닐까? 

"에너지 소비를 줄여라. 경제 외 다양한 인간활동을 발전시켜라!"

국제사회의 현실은 이 책 저자의 주장을 좀 더 현실적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기후변화를 유발하는 온실가스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교토의정서는 이제 그 다음 단계의 기후협약으로 넘어가고 있으며, 한국 역시 교토의정서에서는 해당되지 않던 의무감축 대상국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된다면 한국은 온실가스 배출량을 초과해서 배출할 경우 막대한 돈을 주고 탄소배출권을 사와야 한다.

즉, 많이 일 하고 많이 생산하고 많이 소비하는 이런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기는 어려워 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현재 극심한 경제불황의 고통분담을 이전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지운다면 사회갈등과 문제는 매우 심각해 질 것이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의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은 이렇게 높은 경제성장율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지금 조금 더 현실적인 대안으로 다가와 있다.

저자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포함한 이때까지의 경제발전이 ‘미개발 국가을 발전시킨다’며, 남반구에 문제의 근원을 두는 표현인데 반해, 그 자신이 제시하는 ‘대항발전’은 환경문제의 대부분의 책임이 산업국가인 북반구에 있으며, 이들이 바뀌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의미인 것이다. ‘대항발전’은 2가지 목표를 갖고 있는데 첫 번째는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발전, 두 번째 경제 이외의 인간활동, 즐거움, 행동, 문화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대항발전’은 새로운 형태의 금욕주의가 아니라 일과 소비에 대한 중독을 줄이고, 경제성장을 포기하더라도 의미없고 세계를 파괴하는 일을 줄이자는 주장이다. 저자는 많은 소비에 따른 행복이 아니라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는 능력 그 자체를 발전시켜 진짜 행복을 누리자는 참다운 의미의 행복주의의 수단으로서 ‘대항발전’을 내세우고 있다. 저자의 이러한 주장에는 많은 공감이 가지만 이러한 ‘대항’이 누구에 대한 ‘대항’인지 불분명한 점은 좀 아쉽다.

자본과 국가라는 역사적, 현실적 실체가 아니라 ‘산업문명’이라는 두루뭉실한 유령과 싸울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성장지상주의'는 돈만 되면 강바닥을 파헤치고, 국민주권을 훼손하는 자유무역협정을 비준하는 등 큰 폐해를 만들어 내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와 행정부가 이러한 개발주의를 적절히 규제 및 조절하기 보다는 오히려 부추기는 현 시점에서 경제성장 외에 시민들의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수단과 대안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독서수다모임은 지식문화공간 북카페 노리터의 독서토론 소모임이며, 인상깊게 읽은 책을 소개하는 서평을 발표하며 책과 문화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입니다. 북카페 노리터는 독서문화를 고양하고, 지역의 대안적 문화를 만들고자 모인 청년들의 문화공간입니다. 자세한 정보는 http://cafe.daum.net/jjbookcafe에 접속하시면 공개되어 있습니다.

*이 기사는 경남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으로 원고료를 지급하는 기사입니다.

저작권자 © 뉴스사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