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사회적경제 탐색>(2) 접속, 사유 그리고 실험

<유럽 사회적경제 탐색>이 글은 '하이에나' 시민기자가 2010년 12월에 유럽의 사회적경제 현황을 둘러보고 작성한 해외연수보고서 '유럽의 사회연대경제 조직방문 및 대안경제에 대한 탐색' 중 일부를 요약한 것으로, 매주 2편 씩 소개한다.

     1-1. 프랑스 파리의 낡은 건물들은 햄릿의 대사인 “마디에서 벗어난 시간” the time is out of joint 처럼, 성장과 발전이라는 경쟁 제일의 자본주의적 시간 개념에서 벗어나, 과거의 유산이 현재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듯했다. 끊임없이 미래에 도전하는 듯한 자본주의 상징적 도시, 뉴욕의 고층빌딩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도시적 건축물은 인간의 결과물이지만, 또한 그것은 하나의 세계를 구성한다. 그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가치와 정신을 만들어 낸다는 측면에서, ‘한’ 세계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이다. 높지 않은 그러나 위엄과 특이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듯한 도시 건축물들을 보면서, 저 높은 꼭대기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현자는 잃었지만, 넓은 세계에 걸쳐있는 무수한 익명의 현자들이 살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사진출처 : la fabrique de changement >

    

     1-2. 유럽의 사회적 경제를 운영하는 활동가들이 ‘현재’를 구성하는 방식은 유일신으로 대표되는 1차 형이상학 혁명도, 과학으로 대표되는 2차 형이상학 혁명도 아닌, 제3의 혁명인듯 했다. 그것은 어쩜, 그들의 역사적 경험, 특히 프랑스 68 혁명을 거치면서 경험하게 되는 권위적이고, 구조적이며, 재현적인 사유와의 저항과 투쟁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다른 세계’autre monde 의 가능성에 대한 경험에서 나타나는듯 하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혹은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의 질문을 넘어, “인간은 어떤 식으로 살 수 있을까?” 라는 물음을 던지게 했다.

벨기에 리에주 대학의 드푸르니 교수의 강의에서도 사회적경제를 자본주의 경제의 보충적 개념이 아닌, ‘다른 경제’ 를 통한 ‘다른 삶’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음을 분명 강조하고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프랑스, 벨기에의 사회연대 경제와의 ‘만남’connection 은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방식을 제공한다. 벨기에의 재활용 사회적 목적기업인 '레크마', 프랑스의 공익협동조합인 '랄라스', 시민들의 출자로 이루어진 협동조합 식당인 '시민 카페', 지역 연대금융 기구인 '시갈 클럽' 등은 세상을 “참이냐 거짓이냐” 는 사변적 논쟁을 통해서 바라보기 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차이나는 방식으로 살 수 있음에 대한 관심과 놀라움이 함께하는 새로운 방법을 열어놓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삶의 새로운 가능성의 발견과 발명이라는 의미를 띠게 될 것이다. 존재는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아니라, ‘관여’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1-3.권위와 자격으로 대표되는 ‘공적 지식인’을 거부하고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활동가들의 구체적인 경험과 의견들을 중시하고 그것들을 네트웍으로 묶어내어 ‘살아있는’ 조직으로 만들어 내는 그들의 ‘화용적' 실천 속에서, 푸코michel foucault가 말한 ‘구체적 지식인’ 또는 사이드edward said 가 말한 ‘세속적 지식인’ 그리고 네그리antonio negri 가 말한 '기예가'artist 란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

 프랑스의 조각가 브랑쿠시는 자신의 제작 방식에 대해 '제왕처럼 명령하고 노예처럼 고역을 한다'고 하였다. 이 말은 예술의 이중성 즉, 화폐의 등가법칙과 관련된 '현실적 얼굴''소외되지 않은 본래의 노동'으로 어떤 보상을 위해 하는 행동이 아닌 오직 '즐거움'과 관련된 '잠재적 얼굴'이라는 두 측면이다.

 자신이 스스로 명령하는 노동은 그 어떤 중노동이라 해도 기쁨이며 쾌락이며 아름다움이 될 수 있다. 시민기자는 이 '소외되지 않는 노동'을 협동조합 방식에서 찾을 수 있었다. 예술의 정의가 지각과 감성의 재전유라고 한다면 협동조합에 참여하는 이들이야말로 '일상의 예술가들',기예가들인 셈이다.

 

     1-4. 유럽의 활동가들은 낙관적이지도, 그렇다고 비관적이지도 않은, ‘실험적 사유’의 현실적 활동들을 통해 그것들을‘조합’assemblage하고, ‘구성’compositon해 내는 실재적 활동들이었다. 신과 과학으로 대표되는 ‘확실성’certainty 을 넘어 미래를 지금 여기에서 준비하는 메시아적 ‘믿음’belief 을 간직한 듯 했다.

 익숙함을 버리고 낯선 타자과 만나게 되는, 경계들의 실험적 교차 행위에는 일종의 ‘믿음’이라는 괴상한 것이 전제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세계에 대한 믿음 belief-in-the-world”말이다. 따라서 마주침은 이미 주어진 가능성이 아닌 다른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며,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산출되리라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이 믿음은 우리를 꿈꾸게 만든다. 그 꿈은 유토피아도 디스토피아도 아니어야 한다. 꿈꾸기는 현실’속에서’, 현실과 함께 ‘구성되는’, 현실의 ‘바깥’이기 때문이며, 프루스트marcel proust 의 말처럼 진짜로 꿈을 꾸는 사람은 무엇인가를 증명하고자 밖으로 나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세상에 대한 신념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길을 잃었고 세상은 우리로부터 벗어나버렸다. 우리가 세상을 믿는다면 사건을 촉발시킬 수 있다. 그 사건이 아무리 별 볼일 없고 또 우리의 통제를 벗어난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새로운 시공간 또한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러한 시공간이 아무리 작을지라도 말이다. 우리에게는 창의성도 필요하고 함께 할 사람들도 필요하다”라는 들뢰즈gilles deleuze의 말은 집단적으로 희망을 건설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집단적 희망의 건설을 우리는 프랑스의 '아페스'APES 라는 사회연대 경제 지역 네트웍 조직의 ‘살이있는 연대’ 에서 발견했다

 

     1-5.“내가 속한 국경을 벗어나는 일은 오랜 관성에 찬물을 확 끼얹고, 세상을 인지하는 새로운 감각을 획득하는 동시에, 내 몸과 의식이 담긴 세상을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낯선 포크와 칼을 마주하는 순간, 비로소 우리가 낯선 세계로 왔음을 실감한다. 창발적 사유는 지성의 익숙함이 끝나는 곳에서 발생한다고 했던가? 비로소 우리의 사유는 꿈틀되기 시작한다. 여행이란 어쩜 필연의 왕국에서 우연의 왕국으로 다시 사유와 상상력의 왕국으로 나아가는 것인지 모른다.

 지성은 하나의 시계추운동, 거울방의 인식에 불과하다. 지성은 자신이 보고자하는 것만, 또는 보고 싶은 것만을 취사선택해서 보는 ‘거울의 공범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흔히 제3의 입장, 또는 객관적인 입장에 선다라는 말도 이와 다르지 않다.

 가라타니 와 사이드가 말하는 ‘시차적 관점’(트랜스크리틱) 또는 ‘세속적 비평’이란 어쩜 ‘망명가’의 입장인지 모른다. 망명가의 입장이란 객관적 또는 제3의 입장과는 달리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나, 타자의 힘에 의해 발생하고, 마주하게(encounter)되는 하나의 우연적 사건(event)의 발생에서 생겨나는 관점이다.

 그래서 결코 익숙한 개념으로, 습관적 지성으로 표현하기에 너무 낯선 또는 고통스러운 내면의 울림을 경험하는 것일 것이다. 그것은 익숙한 것들의 유비관계를 포착하고 재구성함으로써 또는 양극단을 잘 조화시킨, 안정적인 제3의 입장을 말하지 않는다.

 오직 기다림과 ,망설임의 시간 속에서만 발효되어가는, 지성의 무성의한 객관주의와 공허한 주관주의의 텅 빈 보편성을 모두 넘어서는 ‘상위의 우월한 관점’의 탄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것은 바로 정감(affection)에 바탕을 둔 질적 역량의 열림, 즉 구체적 보편성의 획득. 이를 우린 ‘강도적 관점’이라 칭한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국가와 시장 사이에서, 개체와 타자 사이에서, 관념과 물질 사이에서, 그 항들과 함께 그러나 그 ‘외부,바깥’에서 발명되어지는 ‘강도적 힘의 관점’ 말이다. 그래서 유럽에서 한국을, 다시 한국에서 유럽을 사유하는 ‘트랜스크리틱’한 방식으로 유럽적 개념의 한국의 재전유를 ‘실험’해야 한다는 ‘믿음’말이다.

 

   2.

 접속 (connection)

접속, 사유, 실험으로 구성되어진 보고서는 서로 다른 시/공간적 위도와 경도로 구성되어진 특징을 담고 있다. ‘접속’은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시민기자가 만나고 나누었던 대화들이, 마치 몽마르트 언덕을 산책하듯 경쾌하게 그리고 실재로 길을 걸으며 기록한 지식과 정보, 녹취자료를 바탕으로하고 있으며, 유럽 활동가들의 자부심과 고뇌가 함께 묻어나는 생기 넘치는 초록의 색깔을 띤다.

 

 사유(thought)

그리고 ‘사유’는 주로 필자의 집이나 커피숍에서 , 관련 서적들을 뒤적이고 시름하면서 만년필로 기록했다. 유럽에서 돌아온 이후 5개월 동안, 토/일요일, 하루8시간 이상의 작업은 적지 않은 인내를 요구했고, 공간이 주는 조금의 여유로움으로 천천히 그리고 멀리 바라보려는 노력들이 부끄럽게 담겨 있다. 오직 다른 세상에 대한 믿음 하나로 견디는, 하지만 이것이 생명의 원천임을 인식하는 파란 바다색을 띤다.

 

 실험(experiment)

마지막의 ‘실험’은 주로 사무실에서 이루어졌다. 늘 분주한 사무실, 모든 것들이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간편하게 메뉴얼화된 것들이 필요하기에 조금은 사무적이고 실용적으로 구성되어졌다. 그래서 화사한 오렌지 색을 띤다.

 그러고 보면 글이란 머리와 손이 아닌, 온 몸과 그것의 현존을 표시하는 시간과 공간과의 결합 속에서 만들어지는 ‘신체적 감응의 결과물’임이 분명하다. 자유/평등/박애를 담고 있는 프랑스 국기의 3가지 색은 그러고 보면 단순한 색깔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 듯 하다. 수천 수만 명의 저항하는 신체와 환호하는 함성 그리고 신음하는 몸의 소리가 담겨 있다. 이제 그 소리를 접속, 사유, 실험이라는 세가지 색에 담아보고자 한다.

*이 기사는 경남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으로 원고료를 지급하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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