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공원’이 아니라 ‘선진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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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공원’이 아니라 ‘선진리성’!
  • 뉴스사천
  • 승인 2011.04.22 11:51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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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어내야 할 일제의 잔재.. 이참에 ‘통양창성’은 어떤가?

  

얼마 전 사천시의 대표 문화축제인 와룡문화제가 펼쳐졌다. 장소는 다름 아닌 선진리성. 그런데 보통의 시민들이라면 이런 궁금증을 가져볼 만하다. ‘선진리성에는 언제부터 벚나무가 심겨져 있었을까?’

이런 물음표에 쉬이 답하기가 어렵다면 다음 글을 읽어보면 좋을 듯싶다. 이 글은 퇴직공무원이면서 사천시 문화해설사로도 활동했던 조영규 씨가 지난 4월10일 사천시청홈페이지 ‘시장에게 바란다’라는 게시판에 올린 것이다.

지난해 사천시에서 낸 자료에 ‘선진공원’으로 표기된 것을 보고 사천시보에 실어달라며 쓴 글인데 당시 시보에는 실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올해 4월5일, 사천시에서 낸 자료에 ‘선진공원’이란 표현이 또 쓰인 것을 보고는 당시에 썼던 글을 다시 올리는 것이라 했다.

뉴스사천은 독자들이 선진리성에 얽힌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일 될 것 같아, 조 씨의 동의를 구해 여기 싣는다. -편집자-

2010년 7월 15일자 사천시청 홈페이지의 보도/해명 코너에 「사천지구 공군 호국영령 추모행사 거행 7월15일 오후 1시30분 용현면 선진공원에서(주민생활지원과)」라는 내용을 보고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선진공원’이라는 명칭을 사천시의 홈페이지에 올리다니...

공공기관에서 보도자료로 배포하는 자료의 용어를 일제(日帝)가 만든 용어로 아무런 여과도 없이 버젓이 사용하다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고 한심하고 분노까지 느끼게 한다.

용현면 선진리 770번지 일원의 61,818㎡의 땅은 1998년 9월 8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74호로 지정되어진 선진리성이다. 선진리성은 1936년 5월 조선총독부가 자기들 선조의 승전지라 하여 고적 제81호로 지정하였던 것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고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된 후 충무공 이순신의 승전지로서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0호로 지정되었다가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선진성이 왜성이라는 사유를 들어 1998년 9월 8일에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격하 지정한 불우한(?) 문화재이다.

▲ 선진리성을 선진공원으로 부르는 잘못을 범하지 말자.
선진리성은 통일신라시대 때 축성된 3,086척 길이의 토성으로, 이 성을 의지하여 고려 초 전국 12조창이 설치될 때에는 통양창이란 조창이 설치되었다. 이 토성은 조창을 방비하기에 유용하게 쓰인 창성이기도 하였다.

조일전쟁이 일어난 후 약 45일 만에 그 창성에 의지하여 주둔한 왜군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1592년 5월 29일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거북선을 처음으로 전투에 투입하여 왜선 13척과 왜군 400명 중 100명 정도를 분멸시킨 사천해전의 승전지이다.

또 1597년 10월 29부터 12월 27일까지 약 두 달 동안에 모리길성을 비롯하여 여러 명의 왜장들이 왜성을 축성하고 그 이듬해부터 왜장 시마쓰 요시히로가 8,000명의 병력으로 주둔하던 것을 명나라 중로군 제독 동일원이 이끄는 명나라 원군 34,500명과 경상우병사 정기룡장군이 이끄는 2,200명의 연합군이 1598년 10월 1일 전투 중에 명나라 팽신고의 진중에서 불랑기포(佛郞機砲)가 오발하게 되어 그 불길이 폭약과 탄환에 옮겨 붙어 오발작용을 일으키게 되고 화염이 충천하자 중로군의 모든 군사들이 당황하여 전열이 혼란해진 틈을 타서 왜군의 반격을 받아 많은 희생자를 내고 패전한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1598년의 무술전투에서 자기 선조들이 이긴 곳이라 하여 1912년부터 1918년까지 선진성의 지대가 높은 곳의 토지를 기부 받거나 매수하여(?) 동쪽(매향비 부근)과 서쪽(사천해전승첩비 부근) 두 곳에다 신사를 세우고 천여그루의 벚나무를 심어 천수각 터에다 사천신채전첩지비를 세우고 공원으로 조성하여「선진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버린 것을 우리 시민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지금까지 선진공원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 선진리성이라 쓸 때도 나루진(津)자가 아니라 진압할 진(鎭)자를 쓰는 것이 역사바로세우기 뜻에서 보면 더 알맞다. 하지만 사천시는 여전히 나루진(津)을 쓰고 있다.
이보다 앞서 일제는 1906년 2월부터 통감부를 설치하고 성곽처리위원회를 만들어 문화말살과 아울러 무력의 집합체인 성곽을 허물게 하고 일제에게 항거할 수 있는 힘과 정신을 말살하기 위하여 전국의 읍성을 비롯한 성곽들을 무너뜨리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사천읍성도 강제로 훼손당하고 거기에다 신사를 세우고 산성공원이라는 이름으로 폄하시킨 것도 그 당시에 이뤄졌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현재의 선진(船津)이라는 지명도, 조선 숙종조에 진보(鎭堡)가 설치되고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1894년경까지 전선소 혹은 선진(船鎭)이라는 이름으로, 진압할 진(鎭)자를 쓰던 것을 1914년 4월 1일 칙령 제111호 군.면 폐치 분합에 따라 전국행정구역개편 시 슬며시 나루진(津)자를 써서 일제에 항거하는 무력적인 어감(語感)을 없앤 것이다.

역사의식을 가지고 지역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올바른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사천시청 공무원으로써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닐까?

현재 문화재로 등록된 선진리성이라는 공식명칭도 엄밀히 따지면 조선총독부가 만든 명칭으로 모순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선진공원이 아니라 선진리성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필자의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본래의 명칭인 통양창성으로 불리기를 바라지만...

▲ 지금도 많은 시민과 관광객들이 선진리성을 찾고 있다. 하지만 선진리성에 얽힌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는 이 얼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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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얼 2012-01-14 03:48:19
성이 훨씬 낫네요

와우 2011-04-29 21:50:40
선진리성의 아픈 역사가 있었네요. 조영규 선생님 수고하십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로 뵈었으면 합니다.

민달팽이 2011-04-25 09:17:35
벚꽃길을 걸으면서, 우리나라 남쪽의 성은 대부분 왜군을 물리치기 위한 용도였을텐데, 벚꽃이 왜 이렇게 많은걸까 의아해했더랬습니다. 굵은 것들이야 왜군이 심었다 치지만 얇실한 것들은 나중에 우리 정부가 심었지 않았을까 해서지요. 공무집행은 언제나 법 테두리에서 맴돌고, 그렇다면 우리가 스스로 이름을 찾아야겠네요.

사천의 연인 2011-04-23 16:05:30
이제는 져서 보이지 않는 산벚꽃을 보고 음미하면서 인공적인 꽃숲은 참으로 부질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사천의 연인 2011-04-23 15:56:36
댓글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하고 싶네요. 댓거리(손가락질?)한다는 것이라고 배웠는데요. 민주주의 원리와 원칙의 척후병이나 첨병 뭐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수의견인데요. 선진의 벚꽃나무는 누가 무엇을 위해 언제 심었를까요? 이 기사를 읽으니 그게 참 궁금합니다. 저도 벚꽃을 너무 좋아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는 참 부끄러운 꽃나무라 생각합니다. 무엇이 그리 그리워서 여기에다가 심었을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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