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함께 한 뉴질랜드에서의 1년 돌아보기③

이 글은 진주시 대아고등학교 이영조 교사가 보내온 것입니다. 가족과 함께 뉴질랜드에서 보낸 1년간의 어학연수 경험을 뉴스사천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고 하네요. 소중한 글 보내주신 이영조 님께 감사드리며, 앞으로 네 번에 걸쳐 싣도록 하겠습니다. -편집자-

연재순서 ①큰맘 먹고 가족과 함께 어학연수 떠나다 ②낯선 곳 낯익은 만남 그리고 새로운 경험 ③타국생활 버팀목, 여행 축구.. 가족! ④공부보다 가족 위한 어학연수 "아깝지 않아"

아이들과 많은 여행을 하는 것을 목표로 잡았기 때문에 주말이 되면 뉴질랜드 북섬 이곳저곳을 구경 다녔다. 우선 집 근처에 있는 해밀턴가든에 가보았다. 해밀턴가든은 무료식물원으로 이곳의 특징은 각국의 전통스타일 정원을 꾸며두고 있다는 것이다.

뉴질랜드 북섬을 여행하며 찍은 가족 사진.
마오리 가든, 마릴린 먼로가 있는 미국식 가든, 영국가든, 이탈리안 르네상스 가든(우리 가족이 사진 찍은 곳), 인도 차 바그 정원, 일본가든, 중국가든 등이 있지만 우리나라 정원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전통정원이라는 것이 있었던가?

오클랜드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one tree hill이라는 곳은 원래 큰 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몇 년 전에 어떤 마오리가 그 나무를 잘랐단다. 그리고 그 사람은 감옥에 갔다나......

마오리말로 큰 산이라고 하는 Mt. Manganui는 반도형태로 튀어나와 있어서 높지 않은 정상에 올라가면 양쪽으로 바다를 끼고 있는 시내를 볼 수 있었고 아니면 산허리를 타고 쭉 돌면 한쪽으로 바다를 쭉 보면서 산책할 수 있어서 멋진 코스였다.

뉴질랜드 북섬 로토루아(Rotorua) 일대의 여러 지열지대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이 와이오타푸(Wai-O-Tapu, 신성한 물)이다. 여기에는 레이디 녹스 가이저(Lady Knox Geyser)라는 곳이 있는데 매일 오전 10시 15분 한 차례만 분출하는 간헐천으로 비누를 넣어 지층의 화산활동을 촉발시켜 조금씩 분출해 최대 20미터까지 하늘로 치솟는 장관을 연출하는 곳이었다.

가족 여행 중 찍은 사진.
Coromandel peninsula에 있는 ‘나니아연대기’ 첫 장면(4형제가 바닷가에서 노는 장면)의 배경이 된 cathedral cove는 주차장에서 걸어서 1시간정도 걸린 곳이었는데, 힘든 내색 없이 걸어서 왕복2시간정도를 따라와 준 상진이가 풍경만큼이나 멋지고 대견했었다.

신부의 면사포처럼 길게 뻗어 있는 Bridal Veil 폭포는 그 이름답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가게나 학교 기타 건물들이 다 동물 캐릭터 구조물과 간판으로 되어 있는 예쁜 동네인 Tirau는 사진을 찍고 구경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낯선 이국땅에서 꿋꿋하게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과 함께 있다는 것이지만, 또 하나의 힘은 축구였다. 내가 살던 곳은 뉴질랜드에서 4번째로 큰 대학교인 Waikato University가 있어 유학생이 많았다. 그 중 한국인 유학생이 상당히 많았다.

그 유학생들이 모여 한인축구클럽을 만들어 일요일에 축구를 하였다. 그 중 내가 나이가 가장 많아 맏형의 역할도 했어야 했다. 혼자서 유학을 온 학생들은 식사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래서 일요일만이라도 축구를 하고 식사를 해결해주고자 평소에 알고 지내던 가게주인으로부터 유통기간이 지난 라면을 10box 기증받아 아내가 맛있게 끓여주었다.

내가 살던 곳은 뉴질랜드에서 4번째로 큰 대학교인 Waikato University가 있어 유학생이 많았다. 그 중 한국인 유학생이 상당히 많았다.그 유학생들이 모여 한인축구클럽을 만들어 일요일에 축구를 했다.
또한 몇몇 애들은 우리집으로 데리고 와 따뜻한 밥을 먹여주기도 했고 이런저런 상담도 해주면서 격려를 했다. 그러면서 축구클럽이 축구가 목적이 아니라 축구를 통해 서로의 친목을 도모하며 서로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갔다.

그러던 중 해밀턴에서의 큰 행사인 소수민족 축구대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곳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이 자국의 명예를 걸고 축구대회에 참여했다. 24팀 정도가 참가를 해 이틀 동안 열전을 벌이는데, 다른 나라 사람들은 축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먹거리와 응원을 통해 그 선수들을 격려를 해왔다고 하는 반면 우리나라 선수들은 햄버거 하나 먹으면서 축구를 했다는 얘기를 듣고 교민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축제의 마당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에 있으면서 그런 활동들을 많이 했기에 충분히 가능했던 일이라 클럽회원들에게 얘기했다. 하지만 너무 소극적인 회원들은 “그게 가능하겠느냐”며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하지만 한 명 한 명 설득해가며 준비를 해나갔다. 디자인을 하는 분께 포스트 제작을 의뢰했고 연 만들기, 제기 만들기, 투호, 윷놀이 등 다양한 민속놀이를 준비했으며 ‘뉴질랜드 대한체육회’에 연락을 해서 후원을 받았고 ‘뉴질랜드 한국전 참전용사회’에서 점심과 음료를 제공받았다. 모든 일들이 내가 계획한대로 잘 진행되어 갔다.

하지만 축구경기 전날, 아르바이트하던 식당에서 감자튀김을 만들다 그만 손에 화상을 입게 되었다. 손등은 물집으로 가득했고 고통이 너무 심해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였다. 내가 주전 골키퍼이기에 붕대를 감고서라도 출전을 강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축구를 하는 것보다는 민속놀이 한마당을 진행하면서 교민들과 열심히 응원하는 것이 더 큰 역할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한국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글과 역사 등을 가르치는 ‘한국인학교’에서 북과 꽹과리를 빌려와 열심히 응원했다.

그 응원덕택에 주최 측으로부터 최우수 응원상으로 상금 250$nz와 메달을 받았다. 또한 그 응원 장면이 지역신문에 나면서 나는 한동안 유명인사가 되기도 했다. 축구대회를 끝내고 뒤풀이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함께 한다는 것, 그것은 희망을 만드는 것이다!”

축구클럽에서의 화합을 보면서 아내는 내심 서운한 마음을 내비쳤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잘 챙기면서 왜 애들은 챙기지 않느냐는 것이다. 사실 한국에 있으면서 아이들을 위해 무엇인가 해 준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아이들에게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생일잔치를 해주고 싶었다. 우진이, 상진이 생일이 모두 11월이기에 함께 해주면 되겠다 싶어 3주 동안 준비를 했다.

아이들에게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생일잔치를 해주고 싶었다. 외국인 친구들을 초대하는 것인 만큼 가장 한국적인 생일잔치를 해야겠다 싶어 민속놀이를 준비했다.
외국인 친구들을 초대하는 것인 만큼 가장 한국적인 생일잔치를 해야겠다 싶어 민속놀이를 준비했다. 지난 번 소수민족 축구대회 때 투호를 비롯하여 물풍선 던지기, 과자 따먹기, 풍선 불어서 터뜨리기를 한 다음 박 터뜨리기로 마무리하면 되겠다 싶어 차근차근 준비를 했다.

물풍선 판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캐릭터를 넣어서 얼굴부분을 오려내어 만들고 물풍선이 잘 터지도록 못을 촘촘히 박았다. 제일 어려운 작업이 박 터뜨리기에 쓸 ‘오재미’였다. 이곳에서 구입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아 전부 수작업으로 만들어야 했는데 오재미를 만들기 위해 천을 구입해서 잘라서 일일이 바느질을 하여 내용물을 채워 넣고 마감질 해야 했기에 시간이 가장 많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가장 좋아했던 게임이기도 했다. 아내는 우진이, 상진이의 생일 케이크를 직접 구웠고, 아이들이 먹을 김밥을 비롯한 모든 먹을거리를 집에서 다 준비를 했다. 힘들기는 했지만 다음날 학교를 다녀온 두 아들이 선생님과 반 아이들로부터 지금까지 참석한 생일잔치 중에서 가장 재미있었고 기억이 남았다면서 고맙다는 인사와 칭찬을 받았다고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의 고생이 말끔히 해소되었다. 그런데 이런 행사를 언제 다시 해줄 수 있을지......

아이들의 생일잔치를 멋지게 해주고 나니 이제는 아내의 생일이 다가왔다. 뉴질랜드에 오자마자 내 생일을 챙겨준 아내를 위해 나도 무엇인가 그럴 듯하게 챙겨주고 싶었다.

한국식으로 준비했던 아내의 생일상.
마트에 가서 돔 한 마리를 사서 손질해 두고, 뒤뜰에 심어두었던 시금치와 마트에서 구입해 온 고사리, 숙주, 그리고 미역으로 나물을 무쳤고, 앞뜰에 심었던 파를 뽑아 파무침을 했고, 평소에 만들어 두었던 도토리가루로 도토리묵을 만들었다.

생일날 아침 오곡밥과 미역국을 끓이고 아내가 손수 만든 생일 케이크와 직접 담근 김치도 함께 올려 상을 차렸더니 뭔가 허전함이 느껴져 이웃집 담장과 우리집 담장사이에 피어있는 꽃을 꺾어 장식했더니 그나마 풍성해 보였다. 아내는 결혼해서 제일 정성어린 생일상을 받았다며 너무나 기뻐했고 아이들도 엄마는 좋겠다면서 부러워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행복했고 ‘안 해서 못하는 것이지, 못해서 안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평범한 진리도 다시 한 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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