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함께 한 뉴질랜드에서의 1년 돌아보기②

이 글은 진주시 대아고등학교 이영조 교사가 보내온 것입니다. 가족과 함께 뉴질랜드에서 보낸 1년간의 어학연수 경험을 뉴스사천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고 하네요. 소중한 글 보내주신 이영조 님께 감사드리며, 앞으로 네 번에 걸쳐 싣도록 하겠습니다. -편집자-

연재순서 ①큰맘 먹고 가족과 함께 어학연수 떠나다 ②낯선 곳 낯익은 만남 그리고 새로운 경험 ③타국생활 버팀목, 여행 축구.. 가족! ④공부보다 가족 위한 어학연수 "아깝지 않아"

▲ 양목장 체험활동
뉴질랜드에 와서 가장 많이 하고 싶은 것은 가족과 함께 여행을 많이 떠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생활한지 얼마 되지 않아 어디를 갈지 몰랐고 아는 사람도 많이 없어 망설여지고 있었는데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목장체험을 하는 프로그램을 제공해주어 가게 되었다.

양들에게 먹이주기, 양털 깎기, 승마 등을 경험했고 개들이 양떼를 산중턱에서부터 우리까지 모는 장면은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돈을 아끼느라 애들에게 맛있는 것을 못해줬는데, 이 날 정말로 맛있고 배부르게 음식을 많이 먹는 애들을 보는 것이었다. 애들에게 맛있는 것을 많이 해주고 싶어서라도 아르바이트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 생일 상 앞에서
뉴질랜드에서 맞이하는 생일은 감회가 남달랐다. 한국에 있으면 여러 선생님들을 집으로 초대해 아내가 정성 드려 식사를 대접했을 텐데, 이곳에서는 생일에 필요한 재료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한국에서 가지고 온 재료로 팥밥, 미역국, 잡채, 나물(숙주, 시금치, 호박), 김이랑 기타 반찬 그리고 케익 대신에 동생이 한국에서 보내준 초코파이4개에 초를 꽂아 생일잔치를 했다. 외국에서 해주는 생일상이 화려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풍성하게 차려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아내는 미안해했다.

▲ 도토리묵 만드는 과정
학교를 오가며 자연의 풍성함을 느끼게 해 준 것이 도토리나무였다. 우리나라 도토리나무는 크게 자라지 않는데 이곳의 나무는 플라타나스나무보다 더 크게 자라고 열매는 어른 엄지손가락만큼 크다는 것이다. 이런 도토리가 지천에 널려있지만 어느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이것을 주워서 도토리묵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시범적으로 조금만 주워서 만들어보고 성공하게 되면 이곳에서 생활하는 한국인분들에게 나눠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인터넷에서 도토리묵 만드는 법을 다운받아서 열심히 만들어 보았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아내는 야채와 소스를 넣어 먹음직스럽게 만들었는데 도토리 특유의 쌉쓰름한 맛이 한국에서 먹던 바로 그 맛이었다. 아니 한국의 도토리묵보다 더 맛있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뉴질랜드에서의 음식제작은 계속 되었다. 도토리묵을 만들고 남은 찌꺼기는 따로 모아두었다가 도토리떡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찹쌀가루와 쌀가루를 섞어 도토리가루를 넣고 만들었지만 나중에는 주변에서 주워온 밤과 호두를 첨가하고 대추 등도 넣어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모과나무를 발견하여 설탕을 절여 넣어 모과차도 만들어 주변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이런저런 소일거리를 만들더라도 역시 돈이 문제였기에 아르바이트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수소문 끝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수업을 마치자마자 식당에 가서 오후 4시부터 밤 10시까지 일을 했다.

커다란 쇠철판을 달궈서 고기, 야채, 소스를 섞은 요리를 빠르게 익혀주는 일이었는데 그 열기가 너무 심해 겨울이라도 비지땀을 흘리며 요리를 해야만 했다. 나중에는 주방에 들어가 야채를 자르거나 양념고기를 만드는 일을 하면서 설거지까지 해야 했다.

양파 15kg을 30분만에 채로 썰어야 했는데, 그럴 때마다 고향생각(?)에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가끔씩 날카로운 칼에 손끝을 잘라 피를 보는 일도 있었고, 감자칩을 만들다가 손등에 심한 화상을 입기도 하였으며 일하던 중에 갑자기 코피가 터지는 일도 다반사였다.

중간에 힘들어 그만 두고 싶은 생각도 몇 번 들었지만 이곳을 나가면 생활이 힘들기에 어쩔 수 없이 계속 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 일 때문에 학교의 다른 친구들과 여행을 가거나 파티에 참석하는 것은 배부른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사치였지, 나에게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다양한 체험활동을 즐기는 아이들.
이런 힘든 일을 하더라도 아이들이 즐겁게 학교생활하고 다양한 활동들을 하는 것을 보면서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 뉴질랜드는 아이들을 위한 나라라는 것이 느껴졌다. 모든 가정의 활동들은 아이들이 하는 활동으로 결정되었다. 수업을 마치고 모든 아이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운동을 하게 되는데 주로 축구, T-ball(softball의 일종), 럭비, 크리켓, 수영 등을 많이 했다.

우리 애들은 축구와 수영을 주로 하게 되었는데, 그 경기들을 하면서 친구들을 많이 사귀게 되었고 덕분에 영어도 많이 늘었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에는 승마레슨을 받았는데, 우진이는 승마자세가 너무 좋다고 칭찬까지 받을 정도였다. 좀 더 일찍 시작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마오리족과의 만남.
뉴질랜드하면 떠오르는 것이 마오리족일 것이다. 마오리족은 폴리네시아의 타이티 섬 부근에 살던 종족이다. 이들은 타조와 비슷한 모아를 잡아먹고 살아 '모아 사냥꾼' 이라고도 불렸다. 마오리 족은 10세기경 카누를 타고 이곳으로 건너왔는데, 이때 고구마 · 얌감자 · 타로감자 · 조롱박 등을 가지고 왔다. 마오리족은 대부분 북섬의 북반부에 정착하여 땅을 파는 막대기와 호미 비슷한 삽으로 고구마를 재배하며 생활하였다. 처음에는 많은 부족으로 나뉘어 추장을 중심으로 생활하면서 부족 간의 전쟁을 되풀이하였다.

그러나 18세기에 백인들이 들어온 후 마오리 족은 백인들과 1840년 와이탕기 조약을 맺어 공존하게 되었다. 마오리족은 조각 · 직물 · 음악 · 무용 등에서 독특한 문화를 창조하였다. 특히 목공예는 다른 폴리네시아 인들보다 뛰어나다. 마오리족은 남자는 목각을 하고 여자는 수직 예술과 길쌈을 하였다.

이들은 집회소의 기둥이나 벽에 독특한 나선무늬와 이상한 표정의 얼굴들을 조각하고, 무기 · 카누 · 일상용품 등에도 조각을 한다. 지금은 공예학교를 세워 전통기법을 전승하고 있다. 쾌활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마오리족은 백인 이주민과 투쟁도 하였으나, 지금은 고유의 문화를 보존하며 백인과 융화하여 살고 있다. (위키백과)
 

저작권자 © 뉴스사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