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화천 기행/산자분수령 낙남정맥은 끊어지고 강은 거꾸로 흘러라

▲ 진양호의 방수로인 삼계천을 거슬러 10여킬로미터를 내리달려 사천만에 이르는 가화천, 지금은 가화강이 되어 국가하천으로 관리 된다.(Google earth 위성촬영)
이 땅의 모든 산줄기는 백두산으로 통한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비롯하여 지리산에 이르러 남도의 평야지대로 흐르는 정맥으로 바다로 흘러든다. 백두산이 심장이라면 백두대간의 대동맥이고 이를지나 우리가 살고 있는 와룡산에 이르러 모세혈관이다. 이처럼 민족의 정기는 산을 타고 우리의 핏속에 면면히 흐른다. 이것은 1대간1정간 13정맥을 이루는 우리 산줄기의 기본으로 보는 조선후기 실학자 신경준의 산경표(山經表)개념이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은 한국 고지리서 산경표의 기본개념으로, 산 없이 시작되는 강이 없고 강을 품지 않는 산이 없으니 산은 스스로 물을 나누는 고개가 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 그러므로 산과 강은 하나이고 이는 유기체적 자연의 선순환 구조이다. 고산자 김정호는 1866년에 이르러 이 산경표를 대동여지도의 근본을 삼았다 한다.

남덕유산이 발원인 경호강과 지리산에서 시작한 덕천강은 진양에 이르러 남강으로 모이고 남강은 영남의 남도를 휘감아 낙동강의 지류가 된다. 수백리 물길을 굽이 돌아 천천히 낙동강에 이르러 바다로 간다.

구한말 마지막 진주관찰사 황철이 부임해 있던 시절 영남춘추의 기록에 의하면 ‘남강홍수를 방지함에는 일거양득의 좋은 방법이 있으니 이는 사천만으로 절하(切下)하는 것이다. 이는 치수와 8천 정보의 비옥한 토지를 얻게 한다’라는 내용이 있다.

1937년8월27일 이른바 병자년 대홍수에서는 진주읍내 6700여호의 가옥중 5500여호가 피해를 입었고 인명피해만도 101명에 이르렀다고 ‘남성공론’이라는 잡지에 실렸단다.

▲ 고 박정희 대통령이 쓴 진양호의 친필휘호, 그 왼편으로 구 댐이 보이고 오른편이 99년에 완공된 남강댐.
남강홍수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이전부터 계속되어 오다가 식민통치 시절의 이른바 통강(通江)정책의 일환으로 남강댐 계획이 입안되었다는 이야기다. 다목적댐 남강댐의 건설, 일제강점기 1926년부터 공사가 시작돼 해방과 전쟁을 겪으면서 중단됐다가 1962년 공사를 다시 시작해 7년 반 만인 1968년 완공된 다목적 댐이며 그 인공호수를 진양호라 부른다.

오늘의 진양호에는 한가로이 가족나들이객들과 연인이 산책중이다. 수자원공사의 물박물관이 있는 기념공원에서 바라보는 진양호는 당초 하루 강수량 400밀리를 견디게 설계된 것이81년 태풍 애그니스의 543밀리의 강우에 조절능력이 없음이 판명나 1999년 새롭게 숭상 완공된 댐과 과거의 댐이 진양호 기념휘호를 두고 나란히 서있다. 3억1천만 입방미터의 저수용량을 가진 인공호수이다. 남강댐의 완공은 진주시민과 낙동강에 이르는 남강하류지역의 수해예방의 결실과 전력생산, 서부경남의 식수원이라는 다목적을 이룬듯했다.

▲ 사천만 방면으로 초당 6000톤의 용수를 방수할 수 있는 진양호 방수로
하지만 사천만으로의 방류는 또 다른 민물담수, 하구의 퇴적 등 환경피해와 어민의 생계를 위협하기에 이른다. 뿐만아니라, 지리산을 출발해 낙동강 하구 신어산에 이르는 약 246.4km의 산줄기인 낙남정맥의 맥을 끊어 놓았다. 낙남정맥, 지리산계인 함양 산청을 이어달려 하동을 지나 사천 고성을 휘어 감아 마산 창원 그 끝 김해에 이르는 백두대간의 맥이다. 그 맥이 잘리고 산자분수령의 원칙이 깨어지고 강이 거슬러 산을 넘어간 인위적 변화를 야기했다. 인공으로 내와 천을 바꾸어 강을 만들고 그 강이 바로 가화강이다.

▲ 국도2호선 확장으로 새로 선 삼계교. 그 다리 아래로 강은 역류하여 가화강으로 흐른다.
사천만 방수로 수문을 지나면 삼계천을 만난다. 수문 아래서 위험천만의 낚시에 빠져있는 조사를 보노라니 우리네 인생이 저런가하는 생각조차 든다. 삼계천이 내려 흘렀다면 이렇게나 물이 없었겠다하는 생각과 함께 거꾸로 흐르는 삼계천과 함께 하동으로 달리는 국도2호선에서 나동공원묘지 방면으로 내려선다.

낙남정맥이 잘리고 정맥 마루금을 대신한 유수교가 보인다. 폭 백미터가 넘게 잘려간 정맥에 아스라이 걸린 다리 유수교, 2001년 8월 준공되기 전까지 유동과 나동 간은 다리 아래 강바닥에 닦은 간이도로로 다녔단다. 그래서 가화강으로의 방류가 있을 때는 수 킬로미터 떨어진 삼계교까지 돌아가야 했단다. 경전철교와 유수교 아래로 보이는 콘크리트와 암반층의 붉은 빛깔은 고스란히 잘려나간 낙남정맥의 흉터이다. 

▲ 지리산에서 남도로 휘어도는 낙남정맥은 남강 방수로의 필요성에 허리가 잘리어 강은 산을 넘어 가화천으로 흘러간다.
산 아래로의 경사도는 제법 가파르다. 초당 수천 톤의 방수는 앞산을 파먹을까봐 콘크리트 구조물로 물이 부서지도록 만들어 두었다. 그 포말이 일어나는 기슭에는 이름 모를 당산나무가 세월을 두고 홀로 지키고 있다.

문득 가화천의 발원지를 보고 싶었다. 가호마을의 실개천이었다.1983년 행정구역 개편이전에는 사천군 곤양면 가화리었던 곳이 진주시 내동면 가호리가 되버렸다. 마을 뒷산은 폐기물매립장과 공원묘지가 들어서 있다. 고풍스런 돌구름 다리 밑으로 이끼를 머금고 흘러내리기를 기대하고 이르렀을 때 역시나 콘크리트 딱딱한 다리 밑으로 그 발원인 실개천은 그런데로 물을 흘려보내고 있다.

유동 고개를 지나 축동면 관동마을에 이른다. 인공의 구조물은 간데없고 태고의 진흙 위를 거닐던 쥬라기시대의 공룡 발자욱이 나를 반긴다. 삼계천의 천연기념물이 거기만 국한되지 않았을터, 이 지역 모두가 천연기념물 제390호 공룡화석산지인 셈이다. 건천 사이로 파인 웅덩이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물고기들이 민첩하게 사라져 그게 붕어인지 은어인지 가름할 틈조차 주지 않는다. 여기저기 돌 틈에 박혀있는 화석이 몇 억년 넘어 이곳에 살았던 공룡의 화석이라고 생각하니 인생이 참 짧다는 생각이 든다.

▲ 쥬라기의 공룡화석이 곳곳에 발견되는 가화강 상류의 관동유역의 하천바닥, 반룡이란 말 그대로다.
호박만한 크기의 바위가 모여 있는 중류로 내 달렸다. 닳고 닳아 생긴 흔적이리라. 잿빛 왜가리가 물고기를 잡다가 인기척에 큰 날개를 펼치고 내달린다. 한가로이 루어낚시중인 조사가 카메라를 눌러대니 당황한 표정이다.

하류 곤양 탑동이 마주보이는 반룡마을에 이른다. 여기는 조선조때 옹기가마가 있었단다. 그때는 육로보다 해로로 물자를 날랐을 터, 나루터가 있음직한 물가에 정치그물을 쳐 놓고 방치해둬 흉물의 몰골로 흩트러지고 찢어져 물따라 나부낀다. 물가에 청둥오리떼가 먹이질을 해대고 무언가에 놀라 화더덕 날아 올라 군무를 선뵈다 이윽고 물로 첨벙 내려앉는다.

바람이 차다. 돌가에 붙은 파래가 바닷가에서 봄직하고 밀물이 들면 이까지 물이 올라오나 보다. 갈대숲사이로 쌓아둔 볏짚이 농부들의 일터인 갯논이라고 알려준다. 쉴새 없이 이는 바람에 갈대가 몸을 흔들고 갈바람에 물결의 주름이 깊어진다. 저 멀리 용수마을변에 석양이 깔린다. 가화천을 거슬러 가화마을에 당도하여 뱃길을 갈아타고 산청의 남명과 교우를 나눴던 구암선생의 이동로의 그 유람선 흔적은 지금의 상류까지는 무리인듯 싶으나 옛날에는 물이 많아 가능키도 했겠다 싶다.

▲ 해질녘의 가화 하구, 진양호에서 관동을 지나 반룡어귀에서 굽이굽이돌아 가화포구인 가산에 이르렀다.
하구에 이르러서는 제법 번잡하다. 남해고속도로 다리위로 빠르게 차가 지나가고 4차선 확장으로 필요 없어진 다리가 주눅이 들어 같이 달린다. 가화하구 가산마을은 예전만 못하다. 조창이 섰던 조선영조의 경강선인(京江船人)이 북적이던 번영은 사라진지 오래고 선외기 몇 척이 닻줄을 묶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무사항해를 기원했건 양반을 조롱해 불렀건 항시(港市)의 질펀한 저작거리는 오간데 없고 그 흔적으로 가산오광대의 탈춤이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73호로 명맥을 이어갈 뿐이다.

▲ 흥청했던 옛날의 조창포구의 흔적은 사라지고 주인을 기다리는 선외기만 남았다.
관동과 반룡 용수를 보고자 내어 달린 건너덕 곤양 탑리의 강변도로에서 조망해 본 축동의 산세는 흡사 동산이다. 한숨 달음박에 오를듯한 야트막한 화당산은 그나마 높다고 150미터. 그 높이에 정자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이름만큼 아름다운 꽃산이 되어 늦은 가을 단풍을 뿜어낸다. 수천년 이어온 백두대간의 낙남정맥이 끊겨 목놓아 울었음에도 계절이 바뀔 때 마다 제 허리 돌아 흐르는 강물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 개발이냐 보존이냐, 하구에 이른 강물은 옛 조창포구를 뒤로하고 사천만을 향한다.
바닷물인지 민물인지 모를 푸른 물이, 눈앞 건너편 사천공단의 오른켠으로 사천만을 향해 무심히 흐른다. 한양으로 가는 조운배의 평안을 비는 아낙의 마음이 되어 지켜서 있는 다리 아래로 비가 많은 계절에 황토빛 물색의 흔적으로 희뿌연 빛깔의 흙때를 입고 퇴적된 돌무더기로 시퍼렇도록 추운 강물이 바다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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