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기억 찾아 떠난 남해 여행기

▲ 삼천포항- 창선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다리, 창선면에 속한다.

경남 남해군은 두 개의 큰 섬으로 이뤄진 곳입니다.

 본섬과 창선도로 이뤄져 있죠. 그런데, 창선분들은 생활근거지가 주로 삼천포항입니다. 남해읍과 창선면은 같은 군에 속하지만 남해읍은 읍대로 형노릇하려고 하고 군에 속한 창선면은 일개 면이지만 절대 남해읍에 지지않는다는 오기(?)가 있어 보입니다. 남해읍과 창선면 사이엔 보이지 않는 묘한 자존심 대결도 느껴집니다(나만의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우선 남해군 전체로 근 현대사에 유명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그런데 본섬인 남해도에 뒤지지 않을 만큼 작은 섬 창선도에도 큰 인물들이 나왔습니다.

현대사에서 남해군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분 중에 한 분이 금암 최치환 선생입니다. 금암 최치환 선생(남해 삼동면 출생)은 일제시대 만주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후 경찰에 투신하여 1957년 34세로 최연소 서울특별시 경찰국장(당시는 행정기관 통합으로 서울시 안에 경찰국이 따로 있었음, 지금의 경찰청장과 같은 경찰의 통합기구가 없었으므로 지금 직제대로라면 경찰청장에 해당)을 지내는 동안 한국 경찰의 대들보가 되었습니다. 제6대, 제7대, 제10대, 제12대 등 하동 남해 지역구 국회 5선 의원을 지냈으며 7년간 대한축구협회장, 경향신문사 사장, 삼성반도체 사장 등을 역임하신 분입니다.

▲ 멀리 보이는 곳이 남해 본섬

 금암 선생에 버금가는 인물이 창선에 계셨습니다. 1970년대 초 서울시장을 지낸 양택식(창선면출신)씨, 시정목표를 대서울 건설로 정하고, 1974년 3년 공사 끝에 서울 지하철 1호선 의 개통으로 본격적인 수도권 도시 철도 시대를 열었습니다. 또 여의도, 잠실, 영동(지금의 강남) 등 3개의 대규모 신시가지를 개발하여 서울의 강남 시대를 열었습니다. 또 세계 10대 도시를 꿈꾸며 시정10개년 종합계획(1971. 1)발표, 폐수처리장, 분뇨처리장 건설 등 대한민국 최초환경대책을 강구하여 명실 공히 오늘의 서울이 있게끔 기초를 닦은 주역입니다.

▲ 남해군 이동면 지족에서 본 창선도(2010.8.11 촬영, 태풍뎬무의 영향으로 물빛이 흐리고 물결이 높다)

남해도와 창선도의 무관 출신대립도 볼 만하죠. 남해의 박익주(예비역 육군 준장, 전 국회의원) 대 창선의 신동관(3공화국 청와대 경호실 차장, 전 국회의원)이 계십니다. 현대에 와서는 남해의 박희태(18대 양산시 국회의원) 현 김두관 경상남도 지사(참여정부 행자부 장관)가 있다면 창선의 고 박홍수(참여 정부의 농림부장관, 전국구 국회의원) 등으로 큰 남해에 비해 작은 창선이 결코 지지 않을 만큼(?) 돼 있다고 보여지네요. 창선주민들의 자존심(?)이 대단하십니다.

저는 창선에 대해 아련한 추억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선친께서 창선에서 교사로 근무하셨습니다. 창선 상죽리에 농가집을 전세 내어 사셨는데, 부모님은 어린 막내만 데리고 있고 저와 바로 밑의 동생은 할머니 댁에서 자랐는데, 방학이면 육지에 살던 나는 동생을 데리고 창선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초등학생 어린 나에겐 그 길이 참 힘들었습니다. 진주에서 삼천포로 버스를 이동하여 삼천포여객터미널까지 걸어갑니다. 그리고 어린 마음에 그 무서운 배를 탔습니다.(배이름이 금진호인가?) 그리고는 창선 당항에 내려서 상죽리까지 약 10리길(?)을 걸어갔습니다. 나도 어린데 더 어린 동생까지 데리고 가기가 참 힘들었습니다. 뜨거운 햇볕아래 따라오지 않는 동생을 홧김에 두들겨 코피를 내고는 나마저 지쳐 자갈길 버드나무그늘에 한참이나 쓰러져 있었던 기억이 너무도 생생합니다. 할머니께서 싸 주신 감자며 옥수수를 점심 삼아 걷다 보면 아침 출발이 거의 오후 어스름이 들 정도였습니다. 참으로 가난했던 당시의 대한민국이었지요. 지금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삼천포-창선 대교를 타면 승용차로 1시간이면 도착하는 길을 거의 한 나절 걸렸으니까요. 오랜만에 추억을 되살려 창선도를 갔습니다.

▲ 창선대교

그리고 창선대교를 지나 남해군 이동면 지족리 바닷가에서 맛있는 장어구이(2인분 갯장어 5마리 2만원)와 남해 마늘 막걸리로 배를 불리며 죽방렴을 구경했습니다.

 “죽방렴을 대나무 어사리라고도 하며, 조선시대에는 방전으로 불렀다. 간만의 차가 큰 해역에서 옛날부터 사용되던 것으로, 지방에 따라 날개 그물의 규모나 원통의 모양 등이 여러 가지다. 1469년(예종 1년) 《경상도 속찬지리지》 <남해현조편>에 나오는 가장 오래된 전통은 경상남도 남해군 지족해협에서 이어지고 있다. 지족해협은 남해군의 창선도와 남해읍이 가장 가까이에서 만나는 곳으로 물길이 좁고 물살이 빨라 어구를 설치하기에 좋은 곳이다.

 

▲ 지족해협의 죽방렴

어구는 간만의 차가 크고 물살이 세며 수심이 얕은 개펄에 V자 모양으로 만든다. 참나무 말뚝을 V자로 박고 대나무로 그물을 엮어 물고기가 들어오면 V자 끝에 설치된 불룩한 임통(불통)에 갇혀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한다. 임통은 밀물 때는 열리고 썰물 때는 닫히게 되어 있다. 물고기는 하루에 두세 번 목선을 타고 들어가 뜰채로 건져내는데, 신선도가 높아 최고의 값을 받고 있다.

 고기잡이는 3월부터 12월까지 이어지며, 5월에서 8월 사이에 멸치와 갈치를 비롯해 학꽁치·장어·도다리·농어·감성돔·숭어·보리새우 등이 잡힌다. 그중 멸치가 80% 정도 차지하는데, 이곳에서 잡힌 멸치는 죽방멸치라 해서 최상품으로 대우받고 있다. 고기잡이가 없는 겨울 동안에는 참나무 말뚝은 그대로 두고 임통만 빼서 말려둔다.”(출처: 네이버백과사전)

 죽방렴은 자연과 인간의 지혜로움이 합작한 원시어업의 대표적인 형태입니다, 이곳 지역민들은 죽방렴을 발이라 하기도 합니다, 발 통 안의 잡힌 고기를 족자로 건져 올려 고급 멸치로 가공하는데 전 과정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집니다.

 죽방렴에 들어간 고기를 잡는 어로작업을 발을 본다고 합니다, 잡힌 생선을 뜰채로 떠서 육지의 발막(대나무로 만든 집)으로 운반해 와서 어종별 구분 작업을 하고 바닷물을 이용하여 꺼린 물에 멸치를 약간 데친 후 통풍이 잘되고 햇빛이 잘 들어오는 양지바른 곳에서 자연건조 후 손으로 선별하여 1~1,5kg단위로 소포장합니다. 이곳 죽방렴에서 잡히는 어종은 다양하나 멸치가 주 어종이며 가격역시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늦여름부터 가을에 잡히는 고급 멸치의 경우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입니다. 최고급 멸치 한 마리의 가격은 시중에서 판매하는 아이스크림 한 개의 가격과 맞먹는다고 하며 주로 선물용이나 술집의 고급 술안주로 나가고 있습니다.

 

▲ 수많은 죽방렴이 설치돼 있다.
 

이곳 지족 해협의 물살이 매우 빠르답니다.

평균 유속 7(12.95㎞)노트 정도랍니다(1노트 시속1.85㎞). 이처럼 빠른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선 멸치들을 죽기살기로 운동을 하기 때문에 맛이 뛰어나답니다.

 잠시 남해 얘기 나왔으니, 관광안내도 겸할까요?

 창선대교를 건너 지족에서 왼편으로 돌아가면 삼동리가 나옵니다. 삼동엔 해오름예술촌과 독일마을이 있고 물건리항엔 천연기념물 물건 방조림이 있어 아늑한 숲속에서 쪽빛 바다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이 밖에도 남해엔 볼거리, 먹을거리, 즐길거리가 많은 곳이지요. 올 여름 늦휴가를 즐기시는 분! 보물섬 남해로 오십시오. 우선 한국의 제일 아름다운 길 삼천포 -창선 대교로 건너오십시오.

상주해수욕장, 남해금산과 보리암, 편백나무휴양림, 나비생태관, 남해 스포츠 파크 등 남해 일주를 하시고 남해의 일몰을 감상하면서 1박 하시고, 남해군 설천면 남해대교를 건너 하동으로 이동하는 길,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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