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불행한 역사 선 긋고 민간교류 넓혀야

세계2차대전이 종전으로 치닫던 1945년 3월26일부터 오끼나와 수비군이 항복문서에 서명한 9월7일까지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걸쳐  일본열도의 남단 오끼나와섬에서만 23만4천여명의 희생자가 났다. 이는 일본에 있어 2차세계대전중의 유일한 지상전으로 기록된다.

 23만4천여명의 희생자 중에 일본 민간인과 군인이 22만명이고 미군 사망자만도 1만4천여명이  넘었다. 이 숫자 안에는 대만인 28명과 한국인 133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인으로 죽어간 수 많은 한국인

야스구니신사 경내의 유취관에 걸려있는 탁경현 사진
1995년 패전 50주년을 맞아 오끼나와현에서는 '세계의 항구적 평화를 기원하기위해 국적을 불문하고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숨져간 23만4천여명의 넋을 추모하고 평화를 향한 마음을 전한다'라는 취지로 平和의 礎 라는 기념비를 제작하고 이 초석에는 안타깝게 숨져간 23만4천여명의 이름을 기록하게된다.

이때 현 동경대학교 객원교수인 홍종필교수가 오끼나와현으로부터 요청에 의해, 창시개명전의 한국이름으로의 한국인희생자 이름 판명작업에 동참하게 된다. 이는 가문과 이름을 중시 여기는 한국정서에 반해 창시개명을 획책한  전쟁당사자로서의 반성이 전제된 작업이었다고 한다.

한편, 자칭 친한파라고 소개하는 일본여성이 있다. 우연히 한국 배구 국가대표선수에 반해 팬이 되었고 한국이 좋아 한국어를 배우고 유학에 까지 이른 지한친한파 일본여성. 방송게스트로 출연하여 죽도로 불리는 독도를 아나운서가 수정해 주어도 독도로 고집하고, 정신대라고 불리는 호칭을 억척스레 위안부로 고집하며 급기야 한류열풍에 대해 한류는 원자폭탄투하라고 발언하여  원폭에 질색하는 국민감정을 건드려 결국 방송국이 사과문을 게재하는 등의 소동을 일으키는 친한뉴스메이커 구로다후쿠미 그녀는 일본의 여류영화배우다.

자칭 친한파 구로다 후쿠미와 탁경현

가고시마 치란비행장의 식당 앞에서 아까바네 레이코씨의 어머니와 함께 찍었다. 탁경현씨는 죽어서 반딧불이가 되어 다시 돌아 오겠다는 말을 남겼단다.
그녀가 16년전 꿈속에 한 청년군인이 찾아 왔단다. "죽은것은 후회가 없으나 한국인이면서 일본인의 이름으로 죽은것이 억울하다"라는 말을 남겼단다. 1036명의 꽃다운 청춘이 꽃도 피워보기전에 전쟁의 광풍에 내몰려 스러져간 소위 가미가제 자살특공대에 대해 관심도, 알지도 못했던 때에 꿨던 꿈속에 만난 조선청년의 한어린 꿈에 이끌려 미망의 시간과 꿈의 편린을 조각조각 이어 갔단다. 2000년 여름 오끼나와를 방문하게 되고 평화의 공원내에 있는 평화의 초에 새겨진 탁경현의 이름을 발견하고  꿈의 조선청년군인이 탁경현임을 확신했단다.

이듬해 2001년 '호타루,가에루'(반딧불이,돌아오다)라는 논픽션소설이 출간된다. 가고시마현 치란비행장에서 특공대원의 식당 도우미로 일했던 아까바네 레이코씨가 쓴 글의 주인공이 탁경현이란다.1945년 5월10일 출격을 앞두고 마지막 밤을 보내며 아리랑을 목놓아 부르는 번뇌속에 고민하는 탁경현이 묘사되어있다. 이 소설은 다시 영화로 제작되어 가미가제로서 스러져간 조선인으로 일본열도에 소개된다. 실제로 1945년5월11일 가고시마에서 450킬로미터 떨어진 오끼나와 근해에서 창시개명한 光山文博(미츠야마 부미히로)는 24세로 전사한다.죽어서 반딧불이로 태어나고 싶다던 소설속의 주인공의 유언과 한국이름을 찾아달라는 꿈 속의 조선인 군인의 미망이 현실로 귀향추념비 계획이 세워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리하여 구로다후쿠미와 홍종필교수는 2002년 즈음 만나게 되고 탁경현의 기일인 5월10일 전후에  한국에서의 친척을 찾게되고, 꿈에 찾아온 조선인청년의 한을 풀기위한 위령비 제막을 설득하기에 이르고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는 이야기고  여전한 반일감정에 제막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곤양 용화사 한켠에 또 다른 상처로, 여전한 현실로 우리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다.

용납할 수 없는 야스쿠니신사 그리고 가미카제 위령비

전불(全佛,젠부츠))이라는 불교계 잡지에 기고한 구로다후쿠미씨의 글에 의하면 "그날 방문한 우리들은, 역사속의 탄압자도 아니고 단지 일본인으로서 과거의 일본이 저지른 행동에 대해 두번 다시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는 염원으로 바다를 건너 방문한것인데..."라며 "유감스런 결과에 지나지 않지만, 이것 이상 우리의 죄가 깊기에 벌어진 일일지도 모른다"며, "한국민이 진정어린 우리의 마음을 이해하고 우리의 진실된 마음이 통해 구천에 이름없이 떠도는 영혼이 영면의 자리를 찾게 되길 희망한다"고 어떤 방식이던 위령비를 세우게 되길 희망했다.

탁경현 귀향기원비 제막식에 참석했던 후쿠미(왼쪽, 사진제공: 오마이뉴스 윤성효)씨와 홍종필 교수

탁경현은 현재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어 있다. 비행모자를 쓴 그의 사진 역시 신사 경내의 유취관에 걸려 있다. 뿐만아니라 이름없이 끌려간 수많은 한국 강제징용자들이 '국가를 위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내놓은 거룩한 영령'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의 호국신사에 안치되어 있다.

잊을만하면  이웃나라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본총리의 신사참배가 이어지는 그곳, 야스쿠니신사는 메이지유신의 태동기인 막후말의 무사를 비롯 청일,러일,1차대전,만주침공,지나침공,태평양전쟁등에서 사망한 군인은 물론 군속 학생 간호원등은 물론 패전이후 전범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군국주의 정신의 요람으로 메이지유신의 초기부터 140여년을 버티어 오고 있다.

일본 항공자위대 다모가미 참모총장이, 논문에서 밝힌 “만주와 한반도는 일본 통치하에서 풍요로워졌고 많은 아시아 국가가 일본의 통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라는 대목, “우리가 침략국가였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억울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19세기 후반 이후 일본이 한반도와 중국 대륙에 군대를 진출시켰을 때 상대국의 양해 없이 일방적으로 보낸 적은 없다”는 주장은 일본정부의 반성없는 모호함과 이중적 행태와 역사인식의 결여에서 나온 위정자의 망언은 우리로 하여금  여전히 군국주의를 경계하게 한다.

진정성 있는 반성 바탕, 민간 평화교류 이어져야

그런 까닭에  탁경현귀향추념비 역시 우리 민족 정서에는 야스쿠니의 악령으로 보이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오히려 이같은 극단의 행동이 우리의 정당성보다 일본의 가련한 친한인사가 봉변당한 포퓰리즘의 극한의 국가라는 이미지만 세계인에게 전달될 뿐이다.

지난 3월 한국관광공사 동경지사와 구로다후쿠미씨의 공동기자회견으로 구성된 '투어단'의 방문이나, 또 다른 한류문화로서 관광사천에 이바지 하겠다는 좋은 취지로 시부지를 지원한 사천시나, 한일의 민간차원의 진정한 관계복원을 위해 기꺼이 고생한 조각가나 우리의 치열한 역사학습과 인식전환이 없다면 이 모두가 희생자들인셈이다.

일본에 끌려가서 죽임을 당하고 이름마저 일본명으로 불리어지고, 찾지않는 주검으로 이름없는 절에 방치되듯 남겨져 고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는 우리의 선조의 유골를 모셔오기 위하여 라도 우리의 의연함이 필요하다. 그래서 결단코 과거와 같은 불행한 역사의 전철은 밟지 않겠다는 선언적 기념비가 우리 손으로 세워져야 한다. 그리고 진정어린 민간 간의 화해는 계속되어야 한다.

광복회 회원들이 위령비 제막식을 반대하는 모습(왼쪽). 탁경현 귀향기원비 일부.<사진제공: 오마이뉴스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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