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묵교육박물관

어느 한적한 시골마을, 꼬불꼬불 골목길을 돌아드니 오래 전부터 그 자리를 지켰을 법한 시골집 한 채가 묵묵히 섰다. ‘내가 찾는 곳이 여기가 맞나?’ 잠시 머뭇거리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내 맘이라도 읽은 듯 “맞게 찾은 것 같은데”라며 반갑게 맞았다.

그의 이름은 박연묵(75세). 그리고 내가 찾은 곳은 박연묵교육박물관이었다.
뉴스사천이 아직 준비단계이던 지난 6월말, 후배기자가 취재하러 간다기에 따라 나선 참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취재보다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주인장이 내가 아는 그분인가? 박물관은 어떻게 꾸며 놓았을까?’하는 것이었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교육박물관장 박연묵씨, 그는 20여 년 전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의 교사였다. 담임은 아니었지만 항상 인자했고, 늘 낡은 자전거를 탔던 분이기에 인상 깊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인지 상당한 세월이 지나고 시골농부의 모습을 했어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머, 별거 없다. 허름한 시골집일 뿐인데 괜히 (교육박물관이란)이름을 붙이가꼬..."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이것저것 묻자 다시 교사의 자리로 돌아간 것처럼 열정적인 모습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거는 46년, 47년에 내가 쓰던 교과서다. 미군정에서 펴낸 거지.” “이거는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모아 둔 편진데, 월별로 정리해 놨다. 찾아보기 쉬우라꼬 장부도 만들어 뒀지.” “이거는 아이들에게 보여줄라꼬 직접 만든 학습자룐데, 꽃의 개화과정을 찍은 기다.”

전시실에는 그의 70여년 세월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어릴 적 쓰던 교과서와 참고서를 비롯해 편지와 각종 우편물, 직접 개발한 여러 학습교구들이 즐비했다. ‘잊혀지지 않는 어린이들’ ‘사랑의 대화’ 등의 기록물과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옛 사진들은 그의 제자 사랑이 어떠했는지 보여준다.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꼼꼼한 기록과 정리, 왜 하는지 물었다.
“그냥 필요한 자료를 제 때 찾으려고 정리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다. 그러니까 내가 필요해서 해 놓은 긴데 박물관이란 과분한 이름을 붙이삔기지.”

그의 말처럼 박연묵교육박물관은 한 사람의 일상에 대한 기록이며 지금도 이어지는 현재진행형의 서술이다. 전시 자료는 책꽂이에, 테이블 위에, 그리고 집안 곳곳에 있다. 그러나 유리상자 안에 갇혀 있지 않다는 것이 다른 박물관과 구별되는 점이다.

무엇보다 장소와 건물이 돋보인다. 박씨가 태어나고 자란, 그리고 지금도 살고 있는 가정집이 곧 박물관이어서 억지가 없다. 내용과 포장의 괴리도 없다. 흙벽과 초가지붕이 새마을운동을 거치며 시멘트벽과 슬레이트지붕으로 바뀐 것은 그것 자체가 역사자료다. 그리하여 마구간은 ‘책방․자료방’으로, 별채는 ‘교사시절의 집’으로, 아래채는 ‘학창시절의 방’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집 뒤란이 유난히 넓은 박물관은 생태학습장으로도 안성맞춤이다. 철따라 피는 꽃의 종류도 다양하거니와 노부부가 일군 밭에는 노동이 빚은 생명과 아름다움이 넘실거린다. 이것 역시 살아 있는 박물관이기에 가능한 모습이다.

그래서 박연묵교육박물관, 그곳을 ‘일상이 고고학과 만난 곳’이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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