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이순 장군으로 '사천시사' 등에 잘못 기록
조선의 이순은 훈련도정을 지낸 절충장군…묘도 존재
이순의 자는 세진…관포 어득강의 글에서도 주인 확인
고려사 등 각종 문헌을 잘못 해석한 데서 오류 생긴 듯

쾌재정의 주인은 고려가 아닌 조선의 이순 장군이다. 동명이인에서 비롯된 오류가 온갖 기록으로 남았으니 이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겠다. 사진은 쾌재정터에 남은 각종 표지석.
쾌재정의 주인은 고려가 아닌 조선의 이순 장군이다. 동명이인에서 비롯된 오류가 온갖 기록으로 남았으니 이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겠다. 사진은 쾌재정터에 남은 각종 표지석.

[뉴스사천=하병주 기자] “이곳 쾌재정(快哉亭)은 고려 말 공민왕 때 이성계, 최영 등과 같은 반열의 무장 이순(李珣)이 사수현에 출몰한 왜적을 물리치고 쾌재(快哉)를 불렀던 곳이라 하여 이름 붙인 정자(亭子)이다. 일명 아호정사(牙湖精舍)라고도 하였다.”

이 글은 축동면의 어제와 오늘을 기록한 책인 <축동면지>에서 쾌재정을 언급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글은 앞으로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쾌재정(快哉亭)은 조선 중종 때 훈련도정(訓鍊都正)을 지낸 이순(李珣) 절충장군(折衝將軍)이 노년에 지금의 축동면 구호마을에 와서 세우고 머물렀던 정자(亭子)이다. 일명 아호정사(牙湖精舍)라고도 불렀다.”

쾌재정에 관한 설명이 이처럼 바뀌어야 하는 이유는 쾌재정의 주인을 잘못 소개한 까닭이다. 사천시가 2003년에 펴낸 <사천시사>와, 쾌재정이 있던 곳으로 짐작되는 자리에 사천문화원이 2001년에 세운 표지석 등에도 비슷한 오류가 있으므로, 언젠가 함께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뉴스사천>의 취재와 조사에 따르면, 쾌재정의 주인 이순(李珣)은 고려 시대가 아닌 조선 시대의 인물이다. 공교롭게도 두 인물은 한자로도 이름이 같은 동명이인(同名異人)이다.

쾌재정이 있던 곳임을 알리는 표지석에서 바라본 모습. 바로 아래로는 남해고속도로가 지나고, 건너로 두원중공업 사업장이 보인다.
쾌재정이 있던 곳임을 알리는 표지석에서 바라본 모습. 바로 아래로는 남해고속도로가 지나고, 건너로 두원중공업 사업장이 보인다.

고려 공민왕 시절에 활약한 이순 장군은 1359년에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대장군으로서 적을 물리쳤다. 이 밖에 원나라 군사와 왜구를 물리치는 등 공적을 쌓아 정이품에 해당하는 삼사좌사까지 올랐다. 그러나 고려가 몰락하고 조선이 개국하는 과정에서 역사에서 이름이 사라졌다.

조선 중기의 이순 장군도 생몰(生歿)에 관한 기록이 정확히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조선왕조실록 등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무과로 벼슬에 들어섰다. 1494년(성종 25)에 내금위로서 표범을 사로잡아 왕에게 바쳐 상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진도 군수, 울산 군수, 창원 부사를 지냈으며, 첨정(僉正),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거쳐 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에 이르렀다.

전의 이씨인 그의 묘는 축동면 구호리 산40번지, 분지등이라 불리는 곳에 있었다. 묘지에는 무덤의 주인이 ‘절충장군 훈련도정 이순’임을 알리는 비석이 서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기록과 사진, 비석의 조각 등만 남아 있는 상황이다. 비석에 쓰인 절충장군은 조선 시대 무관 정3품의 품계이다. 훈련도정은 ‘훈련원의 도정’이라는 직책을 뜻한다. 역시 정3품 당상관의 관직이다. 다만 그의 후대에 일어난 이괄의 난에 증손자 이충길이 인척으로 엮이면서 집안이 몰락한 것으로 알려졌다.

쾌재정이 있었다고 알려진 곳에는 지금도 낡은 기와나 그릇 파편들이 쉽게 발견된다.
쾌재정이 있었다고 알려진 곳에는 지금도 낡은 기와나 그릇 파편들이 쉽게 발견된다.

이 무덤의 주인공인 이순 장군이 쾌재정의 주인이라는 건 1622~1632년에 쓰인 진양지(晉陽誌)에 나온다. 진주의 역사와 인문지리 등을 담은 이 책에는 쾌재정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쾌재정: 장암(場巖)에 있다. 첨정 이순이 지은 것으로, 일명 아호정사라고 했다. 앞에는 바다의 포구에 임해 있고, 동쪽으로는 사천현을 굽어볼 수 있다. 금룡치가 그 서쪽에 있고, 사수가 그 동쪽으로 지나쳐 흘러가니 관망하기에 쾌활하다. 임진왜란 뒤에는 빈터만 남아 있다.’

장암은 축동면 구호리에 있던 지명이다. 1660년 무렵부터 세곡을 모아 서울로 나르던 조세창이 이곳에 있어 ‘장암창’이라 불렸던 곳으로, 한때 꽤 번화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의 두원중공업과 그 앞마을 언저리다. 이순 장군의 쾌재정은 이보다 최소한 100년 전에 세워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쾌재정이 절충장군 이순이 세운 정자임은 관포(灌圃) 어득강(魚得江)의 글에서도 드러난다. 1533년에 곤양 군수를 지낸 관포 어득강(1470~1550)은 이순 장군과는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그가 쓴 글 중에는 ‘李世珍牙湖精舍快哉亭’이란 제목의 글이 있는데, 여기서 세진(世珍)은 이순의 자이다.

이는 전의 이씨의 족보에서 밝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주(李冑)라는 인물의 ‘금골산록(金骨山錄)’이란 글에서도 확인된다. 이주(1468~1504)는 연산군 4년인 1498년에 전남 진도로 유배 간 인물로, 1502년에 금골산록이란 글을 썼다. 이 글에는 “군의 태수 이세진 씨가 찾아와 위로해 주었다”는 대목이 있다. 이순 장군은 1501년에서 1504년 사이에 진도 군수를 지냈다.

이순 장군의 묘비석 사진이다. 구호의 분지등에 있던 것으로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묘비석에 적힌 글을 알아볼 수 있게 설명을 달았지만, 오자가 있다. 도정이란 벼슬의 한자는 都正이다.
이순 장군의 묘비석 사진이다. 구호의 분지등에 있던 것으로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묘비석에 적힌 글을 알아볼 수 있게 설명을 달았지만, 오자가 있다. 도정이란 벼슬의 한자는 都正이다.

이러한 기록에서 쾌재정은 조선 시대 이순 장군이 주인임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쾌재정의 주인이 고려의 이순 장군이라고 어떻게 잘못 알려지게 됐을까. 여기엔 크게 두 가지 살필 점이 있다.

첫째는 고려사 기록의 해석 잘못이다. 고려사 공민왕 편에는 “이순을 양광도 도순문사로 삼아 장암으로 나가 지키게 했다”는 대목이 있는데, 여기서 ‘이순’과 ‘장암’ 때문에 오해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고려 시대에 양광도는 지금의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를 일컬으며, 오늘날에도 충남 서천군에는 장암진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둘째는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이 남긴 글을 잘못 해석함이다. 그가 1558년에 지리산을 유람한 뒤 남긴 유두류록(游頭流錄)이란 기록에는 “先登古將軍李珣之快哉亭”이란 글이 있는데, 이를 풀이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옛 이순 장군의 쾌재정에 올랐다.” 그러나 이는 “먼저 그 옛날 고려 이순 장군의 쾌재정에 올랐다”라고 해석되어 퍼졌다. 역사적 오류를 확산하는 계기가 된 셈이다.

오늘날 이순 장군의 쾌재정은 남아 있지 않다. 사람도 정자도 다 사라진 마당에 그 주인이 누구였냐는 게 뭔 대수인가 싶기도 하지만, 역사는 바로잡을 수 있다면 바로잡아야 한다. 지금도 쾌재정이 있던 자리로 알려진 곳에는 몇 개의 표지석과 기념석이 오류를 품은 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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