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제104주년 기념식 맞춰 제막식 가져
사천호국공원 내 10미터 높이의 조형물 건립
일제침탈에 맞섰던 선조들의 기상과 희생정신 기려

사천항일운동기념탑 제막식이 지난 1일 사천호국공원에서 열렸다. 
사천항일운동기념탑 제막식이 지난 1일 사천호국공원에서 열렸다. 

[뉴스사천=강무성 기자] 사천시가 지난 3월 1일 제104주년 3·1절을 맞아 남양동 소재 사천호국공원에서 사천항일운동기념탑 제막식을 열었다. 이날 제막식에는 사천지역 독립유공자 유족, 국회의원과 도·시의원 등이 함께 했다. 

그동안 보훈단체와 독립유공자 유족들은 항일 독립운동가의 업적과 항일독립 정신을 기리는 항일운동기념탑 건립을 염원해 왔다. 사천시의회에서도 항일독립운동 기념탑 건립 필요성을 담은 5분 자유발언 등을 계속해 왔다. 2019년 첫 제안 이후 4년 만에 항일운동기념탑이 사천호국공원에 세워지게 됐다.

이 기념탑은 3억 8100만 원의 사업비로 지난 2022년 10월 공사를 시작해 12월 15일 가로 5m, 세로 2.4m, 높이 10m 규모로 건립됐다.
이 기념탑은 3억 8100만 원의 사업비로 지난 2022년 10월 공사를 시작해 12월 15일 가로 5m, 세로 2.4m, 높이 10m 규모로 건립됐다.

이 기념탑은 3억 8100만 원의 사업비로 지난 2022년 10월 공사를 시작해 12월 15일 가로 5m, 세로 2.4m, 높이 10m 규모로 건립됐다.

기념탑은 일제의 정치·경제·사회적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강인한 기상으로 솟아오르는 사천시민들의 항일정신과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마음을 표현했다.

기념탑 비문에는 “일제의 침탈로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헌신하신 사천인들을 기리고자 여기에 항일운동기념탑을 세웠다. 을사늑약 이후 우리 민족은 나라 전역에서 자주독립과 광복을 위해 일어났고, 이곳 사천에서도 남녀노소 학생 종교인 등 수많은 시민이 거리에서 시장에서 학교에서 자주독립을 위해 나섰다. 사회단체들이 조직되었고 유림들은 충효를 바탕으로, 다솔사에서는 만당이라는 항일 비밀결사 모임으로 앞장섰으며, 천도교 등 종교단체에서는 만방에 우리의 자주성을 알렸다. 이 의거를 기념하고자 이 탑은 서 있다”고 되어 있다. 

그 아래에는 “이곳 항일정신으로 기치 높은 곳, 시간과 공간이 합일되어 거룩한 애국심으로 세워진 이 탑에서 오늘날 시민들의 감사와 애정이 이 정신에서 더욱 피어나 와룡산은 기상으로 더없이 높아지고 사천바다는 광활히 푸르러지기를”이라며 사천시민들의 염원을 담았다. 

김성숙 독립유공자 유족은 “많은 이들의 염원이 모여 항일기념운동탑이 이렇게 웅장하게 섰다”며 “엄혹한 시기 항일 독립운동을 했던 선조들의 뜻이 후세에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천시가 지난 3월 1일 제104주년 3·1절을 맞아 남양동 소재 사천호국공원에서 사천항일운동기념탑 제막식을 열었다. 사진은 제막식 참가자들의 만세 삼창 모습.
사천시가 지난 3월 1일 제104주년 3·1절을 맞아 남양동 소재 사천호국공원에서 사천항일운동기념탑 제막식을 열었다. 사진은 제막식 참가자들의 만세 삼창 모습.

박동식 사천시장은 “3·1절에 맞춰 기념탑을 제막하게 됐다”며 “죽음을 각오하고 조국 독립을 위해 나선 순국선열들과 사천인들의 고귀한 희생에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항일독립운동 관련 사천시 현충시설로는 사천읍 수양공원 내 ‘3·1의거 기적비’, 사천시 곤명면 다솔사, 곤양면 행정복지센터 앞 ‘의사 최원형 기적비’ 등이 있다. 

사천 관내 현충시설
사천 관내 현충시설

사천의 3·1 만세 의거 전개 과정은?

사천시사와 국가보훈처 등 자료에 따르면, 사천지역에서 만세운동이 가장 먼저 일어난 곳은 곤양면이다. 곤양면 송전리 출신의 김진곤은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곤양 장터의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그는 거사 당일에 ‘대한국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곤양주재소에 투입한 뒤 주민·학생들과 만세시위를 벌였다. 3월 13일 곤양 의거는 진주의거보다 5일, 사천읍 의거보다 8일 빠른 것이었다.

최원형은 서울 3·1만세운동에 참가한 뒤 독립선언서를 간직한 채 고향으로 내려가 당시 해인사 지방학림의 학생이던 최범술(=효당스님) 등에게 전달하고 독립운동을 벌이다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최범술은 최원형으로부터 받은 독립선언서를 1만 매를 인쇄해 사천은 물론 진주, 합천, 의령, 하동, 대구, 경주 등에 나눠주고 만세 시위를 벌였다. 

매년 3월21일이면 사천초등학교 운동장과 사천읍시장 일원에서 기미년 독립만세재현행사가 펼쳐진다. (사진=뉴스사천 자료사진)
매년 3월21일이면 사천초등학교 운동장과 사천읍시장 일원에서 기미년 독립만세재현행사가 펼쳐진다. (사진=뉴스사천 자료사진)

장태영은 강대창, 황순주 등과 함께 사천읍의거를 준비했다. 여기엔 박기현, 김종철, 임순백, 윤수상, 김성언, 이윤조 등이 동참했다. 이윤조는 당시 사천공립보통학교의 졸업반 학생이었다. 거사일은 이 학교 졸업식이 있던 3월 21일이었다. 졸업식 후 가진 축구시합에서 첫 골을 신호로 만세운동이 일었다. 이날 만세 시위는 황순주, 박기현, 김종철이 주도했다.

3월 25일 일어난 삼천포의거에는 남양 출신 박종실이 중심에 섰다. 그는 장지린, 황병두 등과 모의했다. 다시 김우열, 강금수, 장지제, 고광세 등을 포섭해 학생, 청년, 일반면민 3개 단위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거사일을 25일로 잡았다. 이날은 삼천포공립보통학교 제1회 졸업식이 있는 날이자 삼천포 장날이기도 했다. 당일 학생들이 가슴 속에 품었던 태극기를 흔들며 먼저 함성을 질렀다. 뒤이어 제2대의 청년대는 시위장소를 장터로 옮겨 강금수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만세운동을 벌였다.

4월 5일 곤명면에서도 금성리 시골 선비 이영근의 주도로 서당훈장 정원주, 주민 문형근·조개석·조관석·강재빈·이규현·이규필 등 200여 명이 덕천강변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4월 17일엔 곤명면 정곡리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었다. 사천읍 두량리에 살던 류승갑은 4월 14일 당시 읍내면 중선리에서 도로 보수 공사를 마친 뒤 같은 마을 손계묵, 하말금 등과 함께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사남면에선 4월 중순 어느 날 우천마을 청년들이 일본 헌병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산에서 보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일로 17명이 헌병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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