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길, 와룡산 종주길 떠올리며 걷고 또 걸었건만
높은 해발 고도, 변덕스러운 날씨에 몸과 마음 모두 지쳐
어떤 아콩카과 보고서에도 없던 일 결심…‘텐트를 치자’

[좌충우돌 ‘안데스’ 산행기] ④ 조난 혹은 계획 변경

콘플루엔시아에서 아콩카과의 베이스캠프로 향하는 출발지. 이쪽 방향은 과학 조사 구역이니 들어가지 말라는 표지가 놓여 있다.
콘플루엔시아에서 아콩카과의 베이스캠프로 향하는 출발지. 이쪽 방향은 과학 조사 구역이니 들어가지 말라는 표지가 놓여 있다.

[뉴스사천=박용식 경상국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이틀째 산에서 잔다. 3,390m나 되는 고산에서 혼자 이틀을 보내기는 처음이다. 식사를 만들어 먹고 자고 하는 일을 모두 작은 텐트 안에서 혼자 해결한다. 혼자서는 이런 일을 한 적이 없어 걱정했지만, 이건 걱정거리에 못 낀다. 그저 일상처럼 쉬운 일일 뿐이다. 몸 걱정할 새 없이, 오늘 걸어야 하는 길, 그 길 생각으로 벅차다.

18Km. 나는 고산에서 하루 18km를 걸어본 적이 없다. 산에서 18km를 하루에 걸어본 적도 그리 많지 않다. 지리산 둘레길 3코스가 19.6Km였다. 지리산 둘레길, 만만한 게 아니었다. 인월에서 시작해 마천으로 내려왔을 때는 거의 기진맥진했다. 함양 가는 버스의 의자가 얼마나 편하게 느껴지던지. 이때가 2011년이었으니 10년도 더 지났다.

이번 산행을 앞두고 가장 길게 걸었던 길은 사천시 용현면 신기마을에서 약수암으로 올라, 민재봉을 지나 용두마을로 하산하는 와룡산 종주 산행이었다. 2022년 6월 2일. 약 20km. 10시간 정도 걸렸다. 용두마을로 내려와서 진주 가는 버스를 기다릴 때는 이미 밤 8시. 버스를 기다릴 때는 부끄러움을 챙길 여력도 없이 길바닥에 퍼질러 앉았다.

 

오늘 가야 할 길이다.
오늘 가야 할 길이다.

고산에서 15kg 정도의 배낭을 메고 3,390m에서 4,250m까지 18km를 걸어 본 적은 없다. 고도 차가 1,000m나 되는 것도 큰 부담이다. 중간에 무슨 일이 생겨도 위성전화기가 없으니 연락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중간에 포기하고 내려왔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정상 도전도 아니고 베이스캠프 가는 길에,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다. 다들 가는 길이기도 하고 오늘 해가 지기 전에 가야만 하는 길이기도 하다. 지도에는 7시간에서 10시간 정도 걸린다고 되어 있다.

갈 길이 멀어서일까? 콘플루엔시아 캠프에서 아마도 제일 일찍 출발한다. 7시 30분. 몸은 가볍다.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다. 한 20분 가니 커다란 골짜기가 나온다. 20분 정도 내려가서 1시간 정도 올라가야 할 거 같은 무시무시한 계곡이다. 어제 답사할 때는 계곡 건너편에서 올라가는 산악인들의 발걸음이 순례하듯 달팽이처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갈 생각을 하니 숨이 턱 막힌다. 개울을 건너서 중간쯤 오르니 건너왔던 계곡 저편에 한 무리의 산꾼들이 보인다. 그 사람들은 내가 언덕을 다 오르기 전에 나를 앞질러 간다.

1시간 정도 걸렸을까 언덕을 다 올랐다. 안데스의 높은 산들 사이에 끝없는 평지가 보인다. 내리막을 앞두고 잠시 쉰다. 지나가는 등반객이 바람막이 옷을 벗어 배낭에 넣는 게 좋겠다고 충고를 한다. 마음이 급하다 보니 땀 나는 줄도 모르고 앞만 보고 걸었던 모양이다.

 

안데스 아콩카과산의 베이스캠프로 향하는 길.
안데스 아콩카과산의 베이스캠프로 향하는 길.

11시가 넘어가니 노새(mula) 무리가 올라온다. 오늘 가야 할 베이스캠프의 이름이 ‘노새 광장(Plaza de Mulas)’이다. 안데스의 노새는 희말라야의 당나귀나 야크와 같다. ‘그런데 방울 소리가 와 이리 크노?’ 멀찌감치 길을 비켜줘야 한다. 다가올 땐 약간 무서울 정도로 위협적이다. 양쪽에 짐을 실었지만 걸음은 빠르다. 뛰는 녀석도 있다. 노새를 모는 현지인 두세 명은 멋진 복장을 하고 있다. 노새인지 말인지 모를 정도로 큰 짐승 위에 탄 현지인이 부럽다. 살짝 인사만 하고 지나간다. 

12시. 해가 바로 머리 위에 수직으로 있다. 그림자가 안 보일 정도. 적당한 곳을 찾아 배낭을 내리고 쉰다. 갈수록 배낭이 무거워진다. 길은 푸석거려서 모래사장을 걷는 듯하다. 12시니까 점심을 먹어야지. 물이라도 실컷 마셔서 무게를 줄이고 싶지만, 딱 500ml는 남겨 놓자. 혹시 모르니까. 비스킷 2개와 초코바 1개를 먹었을 뿐인데, 배가 고픈 줄은 모르겠다. 숨은 차지만 다리 근육은 짱짱하다.

물을 건너야 한다. 예전 등반팀들은 등산화를 벗고 건너기도 했다는 그 개울 같다. 2~3m 폭으로 길게 이어진다. 내려오는 등반객이 어디로 건너면 되는지 물어보는데 난들 어찌 알까, 나도 안 건너봤는데. 무거운 배낭을 멘 채로 지팡이 두 개를 짚고 멀리뛰기를 한다. 풀쩍! 아, 다행히 등산화에 물은 들어가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오르막이다. ‘우짜지?’

 

산행의 목적지는 베이스캠프였으나 체력 고갈로 등반을 멈췄다. 텐트를 치고 하룻밤 묵으려니 곧 눈이 하얗게 세상을 뒤덮었다. 
산행의 목적지는 베이스캠프였으나 체력 고갈로 등반을 멈췄다. 텐트를 치고 하룻밤 묵으려니 곧 눈이 하얗게 세상을 뒤덮었다. 

2시가 좀 넘으니 눈이 온다. 다행히 첫날과 달리 바람이 뒤에서 분다. 한 30분 걸으니 해가 나고 또 눈이 오기를 반복한다. 바람은 계속 분다. 슬슬 추워지기 시작한다. 바람막이 옷을 꺼내 입고 두꺼운 겉옷 하나도 배낭 위로 옮겨 둔다. 귀까지 덮는 모자를 써야 할 정도로 바람은 차다. 오전에는 반팔, 반바지 차림의 등반객도 있었는데 3시가 넘어가자 초겨울 날씨다.

많은 등반객이 나를 앞서간다. 어떤 이는 아주 작은 배낭을 메었지만, 다른 10여 명은 나보다 더 큰 배낭을 메고도 잘만 걷는다. 이젠 그들도 보이지 않는다. 오르막에서는 속도가 안 난다. 10분에 100m를 걷지 못한다. 한 7~8m 걷다가 2~3분 쉬기를 반복한다. ‘아. 우짜지. 오늘 베이스캠프까지 가는 것은 무리이다. 조난인가? 산행은 여기까지. 텐트를 치자. 자고 가자. 힘들게 가더라도 내일 고소증으로 못 일어날지 모른다.’ 그 어떤 아콩카과 등반 보고서에도 없었던 일을 시도한다. 4시 30분. 베이스캠프를 5.8km 남겨 놓고 텐트 칠 자리를 찾는다. 남은 식량은 400ml의 물과 누룽지 50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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