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삼조 시인
정삼조 시인

[뉴스사천=정삼조 시인] 어느덧, 이월도 반이 지나고 있다. 해마다 새 달력을 접하며 ‘올해는…’하며 다지던 그 각오들은 흔적도 없고, 또 새 해의 날들을 뉘엿뉘엿 흘려보낸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때다. 

하지만 요즘은 새해에 다짐하던 그런 ‘허세(虛勢)며 객기(客氣)’마저 왠지 실종된 느낌이 든다. 시대가 바뀌었다. 우선 달력이 큰 소용이 없는 시대가 되었다. 핸드폰 속에 과거며 미래를 다 아우르는 몇천 년의 달력이 들어 있다. 모든 일정은 핸드폰 속에 저장한다. 태어나고 자라는 일과 미래의 삶의 모습도 핸드폰 속 인터넷에 다 그려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의 일생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자괴감마저 든다. 어쩐지 삶에 활력(活力)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래서야 세상이 너무 재미가 없지 않은가. 정해진 삶의 틀 속에서 조금이라도 내게 이익이 되는 일이 무엇인가를 따지고, 이렇게 사는 일이 최선이라 지레 단정해 버리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세상에 자기를 던져 무언가를 이루어야 하리라던 그 무모함, 범을 그리려다 안 되면 고양이라도 그린다던 그 객기는 다 어디로 갔는가.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그렇지는 않았다. 젊은이들은 꿈을 가지고 세상에 나온다고 다들 믿었다. ‘세상아 기다려라 내가 간다’는 기개(氣槪)도 있었다. 각자의 시대를 겪고 다소 풀이 죽은 선배들도 짐짓 그 새내기들의 용기며 패기를 자못 북돋지 않았던가. 졸업 시즌만 되면, 언론들은 앞다퉈 그 졸업생들의 찬란한 미래를 미리 찬양해 주지 않았던가. 젊음이란 그런 것이라고 지레 생각하던 어떤 것도 있지 않았던가.

과거와 달리 비교적 풍요로워진 우리는 과거에 가졌던 그 ‘꿈’을 이제는 꾸지 않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불확실한 미래에 지레 겁을 내고 확실한 미래를 좇아 그 ‘꿈’을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단정한 어떤 한계 속에 자기 자신을 가두어버린 것은 혹시 아닐까. 

옛날 사람들의 무모하고 무계획적인 도전이 무조건 성공하지 못했음은 자명한 일일 것이나, 성공이 없었던 것 또한 아니었음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는 사람의 온기(溫氣)가 있었고, 삶의 기운이 있었다. 남의 삶에 대하여 간섭할 권한은 누구도 가지지 못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도식화(圖式化)된 삶은 황홀한 봄날을 장차 맞이할 지금 시점에서는 너무 숨막힐 것 같지 않은가.

일례로 젊은이들 중에는 결혼을 않겠다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들었다. 결혼은 하더라도 아이는 갖지 않겠다는 젊은이가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국가와 사회가 이 문제의 해결에 해야 할 일의 몫이 크리라는 생각도 해 보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당사자의 결정일 것이다. 결혼을 하고 나를 닮은 아이를 낳아 새 세상을 열어주는 일은 어쩌면 젊은이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特權)이자 꿈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꿈이다. 그 아이와 함께 열어갈 새 세상도 그대들의 꿈을 기다리고 있다.

나이 든 선배 계층에게도 꿈은 역시 중요하다. 살 날이 많지 않기에 올해의 봄은 작년과 같은 시시한 봄이 아니라 너무도 소중한 봄이다. 우리 일생 중 유일한 2023년 봄이다. 이 봄을 그냥 보낼 것인가. 이 봄에 새 꿈을 꿔 보자. 봄에 씨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다는 옛말을 낡았다 하지 말고 젊은이든 늙은이든 이 봄날에 꿈의 씨를 뿌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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