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섭 시인.
송창섭 시인.

[뉴스사천=송창섭 시인] 겨울이 겨울다움은 알싸한 추위에 있습니다. 매서운 된바람은 몸을 움츠러들게 하고 장롱 깊숙이 넣어 둔 두툼한 옷들을 소환합니다. 옷뿐이겠습니까. 신발, 모자, 장갑, 목도리, 핫팩 할 것 없이 총동원령을 내립니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걸음걸이마저 종종걸음으로 탈바꿈시킵니다.  

겨울은 숲의 삶에도 큰 변화를 줍니다. 숲속 나무는 오랜 시간 공들였던 풍요로운 열매와 귀엽고 예쁜 꽃들, 무수한 청엽들을 하나씩 내려놓습니다. 때가 되면 꽃과 나뭇잎은 나무의 몸통에서 떨어져 낙하합니다. 나무와 꽃, 잎의 이별은 식물이 생성하는 리그닌lignin이라는 성분 때문이라는데, 이는 마치 애이불비에 가려진 눈물의 다른 이름 같습니다. 이렇듯 겨울 숲은 속살과 앙상한 뼈대를 드러낸 나무들로 가득합니다.

나무는 몰아치는 추위에도 묵묵히 제 길을 걷습니다. 나무는 예의 모습 그대로 호들갑을 떨거나 경망스럽지 않습니다. 겨울 설산을 찾는 이들보다 더 강한 정신력과 인내심을 갖고 견딥니다.  

시끄럽고 복잡한 도심의 거리를 벗어나 숲길로 들어섭니다. 헐벗은 나뭇가지와는 달리 숲길은 고요한 죽음과 바스락거리는 삶이 맞닿아 있습니다. 길에는 솔가리를 비롯해 은행나무, 개서어나무, 밤나무, 감나무, 벚나무, 노각나무, 자귀나무, 후박나무, 단풍나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나무들의 마른 잎이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마른 잎은 나무가 대지에 내려놓은 나무비늘입니다. 거저 얻은 것을 생명의 품으로 되돌려 놓는 그 자태는 무욕과 평온의 경지입니다. 슬퍼하지 않으며 원망하지 않으니 이보다 더한 묵언 수행이 있을까요.  

마른 숲속을 거닐면 스스슥 하고 움직이는 소리가 들립니다. 말라비틀어져 봉두난발한 듯한 줄기와 나뭇잎,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새들이 겨울나기를 하고 있습니다. 추위로 잊었던 새의 지저귐이 가까이 다가옵니다. 유리딱새, 직박구리, 동박새, 멧비둘기, 장끼와 까투리, 까치와 까마귀, 떼를 지어 깡동거리는 참새 이들은 숲의 생기를 증언합니다. 새들은 마른 나무줄기와 잎을 헤집고 다니면서 듬직한 나무와 더불어 겨울 숲 지킴이 노릇을 합니다. 

겨울 숲이 사람들의 관심 영역에서 비켜나 있다지만, 삭막하거나 숨쉬기를 멈춘 세계는 아닙니다. 겨울 숲은 눈앞에 보이는 세계를 넘어 보이지 않는 저편 세상까지 나아가려 쉼 없이 움직거립니다. 새로운 목숨을 잉태하고 새 희망을 품는 소리 없는 몸부림을 그치지 않습니다. 겨울 숲은 나지막이 깨어 있는 겸손한 다락방 같은 공간입니다. 

숲길을 걷다가 벅찬 숨을 고르며 쉴라치면 귀를 쫑긋하게 만드는 또 다른 소리의 존재를 만납니다. 따사로운 햇살이 내려앉아 가만히 나뭇잎을 애무하는 소리. 나뭇가지에서 여러 빛깔, 연둣빛 보랏빛 잿빛 연붉은빛 검부잿빛 움싹들이 생의 가치를 일깨우는 소리. 뭔가 흙의 속살로부터 겨울 짐들을 챙기며 하품하거나 기지개를 켜는 소리. 

머지않아 겨울 숲은 꿍쳐 두었던 온갖 나물들을 끄집어내어 무칠 것입니다. 분만실을 자처하여 경이롭고 신비스러운 생명들을 온 땅에 풀어내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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