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야화(野生野話)] 구암리 텃골

구암리 텃골에서 만난 ‘보물’ 개서어나무. 커다란 개서어나무를 정자목으로 만나기는 무척 귀한 일이다.
구암리 텃골에서 만난 ‘보물’ 개서어나무. 커다란 개서어나무를 정자목으로 만나기는 무척 귀한 일이다.

[뉴스사천=최재길 시민기자] 무작정 길을 나섰다가 구암리에 들었다. 골짜기를 따라 들어가니 구암저수지가 나온다. 연못 가로 버드나무가 많아 운치를 더한다. 잔잔한 수면에 곧은 둥치들이 제 모습을 복제하며 물속에 아련히 들어섰다.

버드나무는 수생 생태계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나무다. 뿌리는 물을 정화한다. 그 나무 아래 물풀이 자라면 수서곤충과 물고기가 모여든다. 여기 새들이 찾아와 쉬면서 식사도 한다. 때로는 포유류도 어슬렁거리며 나타난다.

예전에는 주변에서 버드나무를 쉽게 볼 수 있었다. 한 시절 판소리나 대중가요에 가장 많이 등장하던 나무라 하니 얼마나 사연 많은 풍경이었겠는가? 그런데 갑자기 알레르기 소동이 일더니 버드나무를 베어내기 시작했다. 버드나무에 얽힌 문화도 사라져갔다.

논병아리
논병아리

연못을 바라보는데 가까이서 논병아리 한 마리가 귀여운 얼굴을 ‘쏙~’ 내민다. 순간 놀라서 뛰듯이 날아간다. 수면 위로 파문도 재빠르게 좇아간다. 저들끼리 모였다 흩어졌다 반복하며 자유롭게 물질을 한다. 고개를 처박고 물속으로 들어간 자리에선 동심원이 곧장 퍼져나간다.

밭 가에는 사위질빵 열매들이 뽀얀 햇살을 받고 있다. 반짝 빛나는 하얀 솜털은 중요한 여행 장비다. 바람이 잘 통하는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겨우내 하나둘 여행을 떠난다. 뙤약볕에 머리를 틀어 올린 끈질긴 열정으로 새로운 씨를 뿌릴 준비를 하는 거지.

사위질빵 열매
사위질빵 열매

마을에 들어서니 큰 둥치가 썩어서 앙상한 상수리나무에 허물어진 까치집이 보인다. 안집 마당에서 해바라기하는 할아버지를 만났다. ‘저거 허물어진 까치집이 아니냐’고 하니까 처음부터 저렇게 집을 지었단다. 정말 그럴까 싶다. 생전 처음 보는 별난 까치집 광경이다.

마을 위쪽 밭 가에 커다란 정자나무가 하나 있다. 가까이 다가서 보니 개서어나무다. 나무 아래 떨어진 열매가 그 이름을 말해준다. 개서어나무는 날개 역할을 하는 포의 한쪽이 매끈하고 서어나무는 매끈한 쪽에 뿔이 하나 있어 구별된다. 가슴높이 둘레를 재어보니 450cm다. 숨은 보물을 하나 발견했구나! 새싹 튀는 봄에 다시 찾아와 가슴 뛰는 인사를 나누고 싶다.

구암리에는 조경수를 가꾸는 밭이 많다. 개울 옆 목련 겨울눈에 솜털이 반짝이고 단풍나무 끝은 벌써 발갛게 물이 올랐다. 절기를 아는 생명의 바다는 봄을 맞고 있다.

춘란(보춘화)
춘란(보춘화)

골짜기를 따라 이어지는 산길이 깊다. 숲 가장자리 남쪽 경사면에는 자생 난초 춘란(보춘화)이 살고 있다. 포근한 겨울 햇살 아래 날렵하게 푸른 이파리 드리우고 앉았다. 도도하게 꽃피울 그 날도 멀지 않았구나. 누군가의 마음을 뺏어간 야생의 생명!

숲길 맨 끝에 이르니 능선이 가로막은 적막한 산골짜기다. 조그마한 저수지가 하나 더 있는데 텃골 저수지라 한다. 골이 깊은 만큼 물이 참 풍부한 골짜기다. 외딴집에서 수탉이 홰치는 소리가 텃골을 울린다. ‘텃새들도 깜짝 놀라겠다’라는 엉뚱한 생각이 든다.

텃골저수지
텃골저수지

숲 아래로 호기심 어린 눈길 한 번 준다. 도토리 한 알이 낙엽 사이에 숨어서 빼꼼 내다본다. 길가에서 구박받던 떡갈나무가 뱉어놓은 도토리다. 저만의 색깔과 모양을 지닌 자연의 뒷모습을 만나는 것! 겨울 숲 아래서 느끼는 소소한 행복 중에 하나다.

도토리
도토리

내려오는 길, 숲 언저리에 배풍등 열매가 발갛게 익어서 눈길을 끈다. 저 붉은 유혹에는 어떤 녀석이 걸려들까? 멀뚱하게 키를 키운 왕고들빼기는 불어오는 바람에 씨를 다 날려 보냈다.

배풍등 열매
배풍등 열매
왕고들빼기의 꽃받침
왕고들빼기의 꽃받침

제 역할을 다한 꽃받침은 이제야 존재를 드러내는구나. 꽃의 기관에서 꽃받침은 조연이다. 하지만 꽃을 감싸고 받쳐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 주고 나서야 드러내는 하얀 눈망울! 하늘 향해 웃음 짓는 눈매가 곱다. 넉넉한 자연의 밥상 아래서 오늘도 배가 부르구나.

식물 문화 연구가이자 산림 치유 지도사인 최재길 시민기자는 사남면 죽천 사람이다. 지리산 자락에서 오랫동안 머물다 최근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앞으로 사천의 곳곳을 걸으며 만나는 풀과 나무, 숲 따위를 이곳 ‘야생야화(野生野話)’에서 소개한다. 때로는 그의 추억이나 재미난 이야기도 만날 수 있다.    -‘야생야화(野生野話)’ 소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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