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N'과 함께] 이달의 인물 : 한남주 가산오광대 보존회장

가산오광대가 어떤 탈춤인지 설명하고 있는 가산오광대 전수자 한남주 씨.
가산오광대가 어떤 탈춤인지 설명하고 있는 가산오광대 전수자 한남주 씨.

[뉴스사천=하병주 기자] 우리나라 탈춤(=한국의 탈춤)이 인류가 보전해야 할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렸다. 지난 11월 30일에 들려온 반갑고도 따끈한 소식이다. 이 소식에 누구보다 기뻐한 이가 한남주(1954년생) 씨다. 그는 사단법인 국가무형문화재 가산오광대 보존회장으로, 어려서부터 축동면 가산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가산오광대 놀이를 보고 자랐다. 가산오광대는 어떤 탈춤이고, 그 속에서 그는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가산오광대의 옛 이름은 ‘조창오광대’
한남주 씨는 가산오광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가산마을 청주 한(韓) 씨 집안의 종손일 뿐만 아니라, 가산오광대의 오늘이 있기까지 선대부터 특별히 애써 온 까닭이다. 고조부(한경팔)-증조부(한홍이)-조부(한영석)-부(한종기)로 이어오는 동안 가산마을의 토박이 어른들은 늘 오광대 탈놀음과 함께했다. 이는 가산오광대 무형문화재의 2세대 예능보유자에 그의 부친이 이름을 올렸었고, 현재 유일한 예능보유자인 한우성 씨가 집안 어른이라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사천 무형문화재 전수교육관에서 만난 그는 대뜸 마을 자랑부터 했다.

“우리 마을에는 한때 조창(漕倉)이 있었어요, 가산창이라고. 1760년부터 134년간 운영되었죠. 조운선이 20척에, 1척당 사공이 48명이었다니 엄청나게 잘 나가는 마을이었겠죠. 그때는 300가구가 넘었다고 들었어요. 저의 고조부의 회고록에 따르면 가산오광대는 이 조창과 연결이 돼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제가 어릴 때는 ‘조창오광대’라 부르다가 문화재로 등록하면서 ‘가산오광대’가 되었거든요.”

 

지난해 가산마을 문화센터 개관식 때 가산오광대 공연모습.
지난해 가산마을 문화센터 개관식 때 가산오광대 공연모습.
공연중인 한남주 씨.
공연중인 한남주 씨.

가산오광대가 맨 처음 문화재로 등록한 건 1974년의 일이다. 해마다 정월대보름에 맞춰 탈놀음을 해 오다가 1960년 무렵에 전승이 끊겼다. 그러다 강용권 전 동아대 교수가 1971년에 연희본을 발굴하면서 부활했다. 1974년에 서강대학교 민속문화연구회(당시 회장 이훈상)가 복원 연희를 한 끝에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됐다. 정부는 영남형 민속가면극의 원형이 잘 남아 있다고 평가해 이로부터 6년 뒤인 1980년에 국가무형문화재 제73호로 등록했다(※정부 정책에 따라 지금은 등록번호를 붙이지 않는다.)

“마을에선 섣달그믐 밤이면 늘 동제를 지냈어요. 우리 마을에선 천룡제(天龍祭)라 불렀는데, 새벽 1시쯤 끝나면 메구(=징과 꽹과리 등으로 하는 농악)를 쳐서 제(祭)가 끝났음을 알렸죠. 이때부터 정월대보름까지 지신밟기 삼아 매일 놀았던 것 같아요. 우물, 부엌, 장독대, 외양간 등으로 집마다 돌았습니다. 주로 낮에는 일하고 밤에 많이 놀았죠. 그땐 참 재밌는 분이 많았어요. 재능도 뛰어났고. 춤, 노래는 기본에다 젓가락으로 흥겨운 장단을 만들어내는 게 일품이었어요. 그분들은 이제 다 돌아가시고….”

탈춤 전승자의 길을 가다
인생무상이요, 또 무상한 게 세월이다. 어쩌면 그러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새로운 역할이 주어지는 것일지 모를 일이다. 구호초등학교와 사천중학교를 나온 뒤 타향에서 대학 공부까지 마친 한 씨는 일찌감치 객지 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다 2005년께 고향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고향마을은 예전 같지 않았다. 남강댐에서 쏟아져 내린 홍수로 논밭 대부분이 사라지고 없었다. 허전한 마음을 달랠 겸 아버지가 정성을 쏟았던 가산오광대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가산오광대에 대한 그의 사랑은 표정에서도 충분히 느껴진다.
가산오광대에 대한 그의 사랑은 표정에서도 충분히 느껴진다.

“2006년부터 전수 교육을 시작했어요. 처음엔 악사로서 징을 들고 맨 뒤쪽에서 따라다녔는데, 놀이판 전체를 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어요. 1년쯤 지나 박 봉사, 옹생원, 양반, 황제 장군 등의 배역을 차례로 맡게 되었죠. 러시아, 중국, 일본 등 해외 공연도 나가면서 탈놀음에 더욱 재미를 붙였던 것 같아요.”

한 회장은 그동안 전수자 과정을 거친 뒤 지금은 이수자 단계에 이르렀다. 또, 예능을 배우는 데만 그치지 않고 행정 지원 업무에도 관심을 뒀다. 그렇게 2020년부터 가산오광대 보존회장을 맡았다. 

“보존회장을 맡자마자 코로나19가 찾아왔어요. 자연스레 활동도 줄고 침체기에 빠졌죠. 그나마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기에는 괜찮다고 여겼는데, 마침 ‘한국의 탈춤’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리는 경사가 생겼어요. 가산오광대가 사천의 큰 문화유산일뿐더러 세계가 인정한 문화유산이라니, 탈춤 전승자로서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가산오광대만의 색깔, 의미
이번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탈춤’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평등’을 강조하고, 사회 신분제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여기엔 가산오광대를 비롯한 13개의 국가무형문화재와 5개의 시도무형문화재가 포함됐다. 가무(歌舞)와 연극의 성격을 모두 가진 ‘한국의 탈춤’은 부조리한 사회 문제들을 풍자와 해학을 담아 공론화한다는 게 특징인데, 가산오광대만의 색깔이 더 있단다.

가산오광대 공연 모습,
가산오광대 공연 모습,

“가산오광대가 굿거리장단에 덧뵈기춤을 기본으로 한다는 건 다른 탈춤과 비슷해요. 하지만 대사가 무척 길고 많다는 게 다른 오광대나 탈춤과 구별되는 점이죠. 그래서 화려함이 덜하다고 느낄 수 있어요. 이야기의 결말도 특이한데, 다른 것은 끝에 할미가 죽는 데 비해 우리는 영감이 죽어요. 남존여비 사상이 강하던 때에 어찌 이런 결말에 이르게 됐는지 궁금한 대목이죠.”

가산오광대가 다른 지역의 오광대나 탈춤과 구별되는 또 다른 특징은 오방신장무(청제, 백제, 적제, 흑제, 황제) 춤사위가 계승되고 있다는 점이다. 황제장군을 중심으로 사방신장이 춤을 추며 탈춤의 시작을 알린다. 사방신장이란 민속에서 신병(神兵)을 거느리고 사방을 맡았다는 신의 장수다.

모두 6과장으로 구성된 가산오광대에서 잡귀를 막고 부귀공명을 기원하는 이 장면은 제1과장(오방신장무과장)에 해당한다. 이어 영노(=가상의 괴물)가 등장해 오방신장과 대치하는 제2과장(영노과장), 다섯 문둥이의 삶의 애환을 다룬 제3과장(문둥이과장), 양반의 무능과 허식을 풍자하는 제4과장(양반과장), 노장(老壯)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파계승이 되는 과정을 그린 제5과장(중과장), 본처와 첩 사이의 갈등으로 가정이 파탄하는 과정을 다룬 제6과장(할미·영감과장)이 뒤를 따른다. 한 회장에게 가산오광대가 어떤 의미냐고 물었더니 마음속 숙제를 한 꾸러미 쏟아냈다.

“탈춤은 내게 엄마의 손짓과 같아요. 탈을 쓰면 늘 마음이 편하거든요. 한편으론 숙제도 많죠. 하나는 탈과 춤의 원형을 찾고 지키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시대에 맞는 새로운 내용과 형식의 탈춤을 창조하는 일입니다. 하나같이 젊은 춤꾼들이 붙어 줘야 가능한 일이고, 주변에서 관심과 지원이 따라야 가능한 일이죠. 이번에 유네스코에도 이름을 올렸으니, 좋은 일이 또 생기지 않을까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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