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야화(野生野話)] ⑮ 곤명 조장리

곤명면 조장리 들판에 있는 정자. 개서어나무 한 그루가 곁을 지키고 있어 풍경이 덜 외롭다.
곤명면 조장리 들판에 있는 정자. 개서어나무 한 그루가 곁을 지키고 있어 풍경이 덜 외롭다.

[뉴스사천=최재길 시민기자] 오후 햇살이 따스해 보이는 곤명면 조장마을에 들었다. 다솔사에서 나오다 보면 정면으로 빤히 보이는 마을이다. 동으로 굴참나무로 가득한 벼랑이 옹벽처럼 섰고 서쪽으론 너른 벌판이 가로 열렸다. 벼랑 아래 서서 자연 옹벽을 올려다본다. 굴참나무 가지가 만드는 솜털 위로 하늘이 마음에 푸른 인사를 한다.

굴참나무 옹벽
굴참나무 옹벽

어느 집 대문간에 철 늦은 국화 한 무리 피어나 길손을 맞는다. 영하의 기온에 얼음도 얼었건만 참 강하기도 하지. 그래서 불의나 유혹에 무릎 꿇지 않는다는 의미를 두었구나! 옛 선비들이 가까이한 뜻을 짐작하겠다. 울타리 삼아 심어놓은 조경수, 남천 열매는 저녁 햇살에 붉은 울음을 토하고 있다. 한겨울의 추위가 조금은 누그러질 온기! 몸을 데우는 데 연탄이 있었다면 맘을 데우는 데 남천 열매도 있을 거다.

국화
국화
남천열매
남천열매

들판 가장자리에는 산수유 붉은 알알이 새들을 유혹한다. 물까치, 멧비둘기 등이 찾아와 열매를 먹는다. 씨가 커서 챙길 것은 별로 없을 것 같구나. 우리나라 산수유 재배 역사는 오래되었다. 『삼국유사』에는 이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신라 경문왕 설화이다. 모자를 만드는 장인이 임금님의 귀 모양을 말 못 하고 살다가 대밭에 가서 외쳤다. 그랬더니 바람만 불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들렸다지. 경문왕은 이 소리가 듣기 싫어 대나무를 베고 산수유를 심게 했다고. 누구나 지키기 어려운 것이 비밀이다. 소문은 인간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비롯되니 인간사의 비화를 관통한다.

산수유
산수유

아침 일찍 피어나 싱그러운 나팔을 불어대던 나팔꽃은 덩굴줄기 채 말라비틀어졌다. 수확하지 않은 아주까리 열매도 바싹 마른 채 줄기에 매달려 있다. 예전에는 아주까리기름을 생활에 많이 이용했다고 한다. 잎은 나물로 먹는다. 올해에도 어머니는 피마자 나물이라며 상에 내놓으셨다. 달지도 않고 쓰지도 않은 담백한 맛이다.

나팔꽃열매
나팔꽃열매

 

아주까리열매
아주까리열매

사실 피마자(蓖麻子)는 아주까리씨를 일컫는 한약명이다. 피마자에는 ‘리신’이라는 독극물이 들어있다. 독성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공산국가였던 불가리아의 요인을 암살하는 데 사용한 예가 있다. 리신이 든 독침을 맞으면 천천히 독이 퍼지면서 사망에 이른다고 한다. 식물이 독물질을 만드는 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다. 인간은 이 독을 뽑아 사약도 만들고 한약도 만든다. 양날의 검을 결정하는 것은 마음에 달렸다.

들판 가운데 눈길을 끄는 정자나무 하나 있다. 다가서 보니 줄기에 연륜이 느껴지는 개서어나무다. 300년 전 조장리에는 율목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그땐 밤나무 정자였는데, 지금은 개서어나무 정자로 남았다. 이 정자에서 바라보는 봉명산 능선은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봉긋한 선은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아 팽팽한 긴장감을 준다. 나무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김환기 그림 속의 달항아리 같다. 이국의 땅 파리에 있으면서도 우리의 자연과 항아리를 통해 우주를 본 화가! 저번에 봉명산이 여인의 젖가슴을 닮았다 했지만, 이렇게 보니 또 확실히 달항아리다.

조장리에서 바라본 봉명산
조장리에서 바라본 봉명산

봉명산은 오행에서 말하는 금의 기운을 가졌다. 산을 덮은 살이 두터워 토산이라 한다. 기운이 똘똘 뭉쳐 결실의 풍요로움을 안겨주는 형세다. 예전에 조장리에는 방앗간이 있어 새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한다. 조장리라는 지명의 유래도 여기서 왔단다.

개서어나무 정자는 가을걷이가 끝난 빈 들판을 내려다보고 섰다. 그 너머로 지리산 천왕봉이 보인다. 저 멀리서도 존재를 드러내는 서부 경남의 중심이자 지붕이다. 정자는 멀리 천왕봉을 이고 가까이 봉명산을 드리웠다. 매사에 대관소찰(大觀小察), 크게 보되 세심하게 살피는 자세도 중요하지 않겠는가!

식물 문화 연구가이자 산림 치유 지도사인 최재길 시민기자는 사남면 죽천 사람이다. 지리산 자락에서 오랫동안 머물다 최근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앞으로 사천의 곳곳을 걸으며 만나는 풀과 나무, 숲 따위를 이곳 ‘야생야화(野生野話)’에서 소개한다. 때로는 그의 추억이나 재미난 이야기도 만날 수 있다.    -‘야생야화(野生野話)’ 소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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