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야화(野生野話)] ⑭ 곤명 봉명산

천년 고찰인 다솔사를 품은 봉명산 숲길이다.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겨울이 만든 여백이 상쾌하다.
천년 고찰인 다솔사를 품은 봉명산 숲길이다.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겨울이 만든 여백이 상쾌하다.

[뉴스사천=최재길 시민기자] 빈 들판같이 삭막한 계절을 맞았다. 삭막해서 좋은 건 무엇인가? 군더더기 없는 자신을 고스란히 드러내기에 좋다.

봉명산에 오르기로 맘먹고 다솔사에 들었다. 입구를 노랗게 물들였던 털머위 꽃이 지고 솜털 열매가 부풀고 있다. 안심료 뜰앞 모과나무엔 잎을 떨군 모과가 노랗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저 커다란 열매는 어쩌면 지금도 떨어지지 않고 매달려 있을까? 야생의 열매라면 상당히 낯선 풍경이다. 그래서 후손을 위한 씨앗을 옮겨줄 중매쟁이는 인간이기 십상이다. 모과는 중국에서 들어온 오래된 정원수다. 

목과
목과

다솔사를 가로질러 이내 봉명산 자락 숲길로 들어선다. 한 무더기의 삽주 꽃이 열매로 변하는 사이 잎에도 노란 물이 들었다. 산모롱이 돌아서다가 알알이 여문 댕댕이덩굴 앞에 섰다. 햇살이 눈길을 마주하는 길섶에 자신을 드러낸 조그만 포도송이! 탱글탱글한 자태가 돋보인다. 모든 것이 저를 드러내고야 마는 계절이다.

댕댕이 덩굴
댕댕이 덩굴

숲 아래 가막살나무 알알이 붉은 열매도 제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 열매는 인류가 오래전부터 이용했을 거라는 기록이 있다. 일본에서 신석기시대 술독으로 사용했던 유물에서 가막살나무 열매가 발견되었다. 학계에서는 고대 인류가 술을 담가 먹었을 거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역시 낭만적이고 흥을 아는 조상님들이었구나!

가막살 나무
가막살 나무

봉명산 정상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춤을 추는 소나무들이 한데 모여 진을 치고 있다. 잠시 잠깐 정자에 올라 구불구불 춤추는 소나무들의 군상을 바라본다. 함께 어우러져 살면서도 햇빛을 좇아 위로만 내달리지 않아서 좋다. 서로서로 공간을 조율하는 여유가 있어서 좋다. 맞은 편 내리막길로 내려서면서 바라보는 산의 능선이 단순명쾌하다. 군더더기 없이 유려한 능선은 봉명산의 자태를 닮았다. 거울을 바라보니 그 속에 내가 있구나.

봉명산에서 바라보는 무송
봉명산에서 바라보는 무송

한 이주쯤 지나 다시 봉명산을 찾았다. 숲길 가의 가막살나무 열매는 거의 떨어져내리고 없다. 그사이 새들의 겨울 곡식 창고가 줄어든 것이다. 야생의 겨울이 추운 이유다. 삽주는 꽃이 줄기 채 말라 서걱서걱 열매가 여물었다. 하지만 삽주는 뿌리가 힘을 쓰는 약초이다. 꽃이 그대로 말라 열매가 된 모양새는 주로 국화과 식물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꽃과 열매의 특징에 큰 변화가 없다는 거지.

삽주
삽주

반대로 꽃과 열매가 너무 달라서 전혀 이어볼 수 없는 식물도 많다. 남부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삭줄 꽃은 다섯 장의 흰 팔랑개비지만 열매는 두 개의 길다란 꼬투리를 지녔다. 농작물 중에는 대표적인 게 호박이다. 가느다란 줄기에 수더분한 노란 꽃송이 하나가 제 몸도 가누지 못할 만큼 큰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농작물로 오랜 시간 인류의 손길을 거치면서 육종되어왔기에 가능한 일이겠지?

봉명산 자락의 다양한 숲길은 어디로 가더라도 소나무로 가득하다. 말 그대로 ‘다솔’이다. 그래서 그저 평범한 일상의 솔숲으로 다가온다. 발걸음도 평온하다. 살펴보니 솔방울은 이미 떨어져내린 것도 있지만 매달린 것도 많다.

봉명산 무송
봉명산 무송

벌어진 비늘껍질 안에 솔씨가 들어있다. 겨우내 천천히 솔씨를 날려 보내려는 의도다. 하지만 이 솔씨는 뭇 새들의 겨울 먹이도 된다. 건조한 날이 계속되니 비늘껍질이 열리면서 솔씨를 날리기 좋다. 만약 비가 와서 습도가 높아지면 비늘껍질은 닫혀버린다. 어차피 솔씨를 날리지도 못할 테니까.

솔방울
솔방울

비늘껍질은 습도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는 두 개의 물질로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 바깥쪽이 안쪽보다 더 빨리 부풀어 오르면서 닫히는 거지. 이처럼 자연현상을 이용하는 식물의 놀라운 지혜는 어디서 오는 걸까? 두뇌의 ‘사고작용’이라고 믿는 우리의 생각은 지극히 인간중심일지도 모른다. 세포 단위의 사고작용과 네트워크! 그 심연의 파동에서는 식물이 몇 수 위에 있다.

식물 문화 연구가이자 산림 치유 지도사인 최재길 시민기자는 사남면 죽천 사람이다. 지리산 자락에서 오랫동안 머물다 최근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앞으로 사천의 곳곳을 걸으며 만나는 풀과 나무, 숲 따위를 이곳 ‘야생야화(野生野話)’에서 소개한다. 때로는 그의 추억이나 재미난 이야기도 만날 수 있다.    -‘야생야화(野生野話)’ 소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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