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야화(野生野話)] ⑥덕석골

용현면 신복리에 있는 덕석골에서 지리산 쪽을 바라본 모습.
용현면 신복리에 있는 덕석골에서 지리산 쪽을 바라본 모습.

아침 날씨가 꽤 선선해졌다. 고향 집에서 가까운 덕석골(용현면 신복리)로 산책을 나섰다. 어릴 적 배고픔을 달래준 기억이 생생한 곳. 굽은 언덕 위에 우리 가족의 생계를 이어주던 사나운 밭이 있었다. 홀어머니는 참깨와 콩, 무, 배추를 심었다. 가을이면 살이 찐 고구마를 ‘리어카’로 힘겹게 실어나르던 추억! 지금은 얕은 고갯길 같지만, 어릴 적 수레길은 어찌 그리도 사나웠던지.

고구마는 추운 겨울 우리 가족의 허기진 배를 야무지게 챙겨주었다. 컴컴한 밤, 비좁은 구들방에 모여 앉아서 날것으로 깎아 먹고, 아궁이 잿불에 구워도 먹고, 뜨끈하게 삶아도 먹었다. 그보다 전에는 이 밭에서 아버지와 함께 수박 농사도 지었다고 하신다. 덕분에 구순을 바라보는 어머니는 관절 마디마다 골병이 들었다. 점점 삭아가는 어머니의 관절 마디에서 우리 5남매는 자라났다. 그런데도 이 자식은 아직도 노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으니…….

정수사 앞을 지나는데 가래나무에 열매 몇 개가 떨어져 있다. 쪼그리고 앉아 몇 개 주워본다. 가래나무는 토종 호두라고 한다. 호두는 동그랗지만, 가래는 열매가 길쭉하고 좀 작은 편이다. 호두는 고려 때 중국에서 들어왔다고 한다. 원래 고향은 ‘이란’일 거란다.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 커다란 가래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바람이 다녀간 가을날 아침이면 쪼르르 달려 나가 열매를 줍곤 했다. 먹을 것이 귀할 때였으니! 그땐 이 열매를 ‘추자’라 불렀다. 이젠 추억 속의 나무로 남게 되었다. 옛 교정에는 그 시절을 담고 있는 가시나무 한 그루와 왕벚나무 몇 그루만 덩그러니 남았다. 이야기를 품은 세월의 나무는 귀하기만 하거늘.

수크령
수크령

정수사 뒤로 돌아가니 조그만 연못에 아침 햇살이 내려앉아 반짝거린다. 빛의 알갱이들이 따스한 온기를 전해준다. 연못 둑에는 억새가 피어나 살랑살랑 은빛 고개를 흔든다. 돌아앉은 길바닥엔 수크령이 피어 성긴 털옷으로 햇살을 받아내고 있다. 살갗을 할퀴는 무시무시한 잡초 환삼덩굴은 순한 꽃줄기를 피워올렸다. 습기 찬 묵정논엔 부들이 길쭉한 방망이를 꺼내 들었구나. 산골짝 밭두렁엔 야생의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마주치는 눈길마다 털털한 가을 맛이 난다.

부들
부들



아래쪽으로 내려올수록 논이 많아진다. 지형을 따르는 농경의 이치! 이제야 알아차리게 되니, ‘덕석골에 둠벙이 참 많구나.’ 둠벙은 하늘만 바라보며 농사짓는 천수답에 아주 중요하다. 생명수인 물 얻기가 그만큼 어려우니까. 둠벙은 논농사와 긴밀히 연결되어 작은 생태계를 이룬다. 물풀이 어우러져 미꾸라지, 장어, 메기, 붕어, 물방개, 소금쟁이, 개구리, 물뱀, 이 밖에도 물새와 온갖 천적들이 모여든다. 어떤 수서곤충과 물고기는 논에 물을 대는 철이면 논으로 나와 살다가 논에 물이 바닥나면 둠벙으로 돌아온다. 둠벙은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삶의 안식처인 셈이지. 하지만 경지정리와 지하수를 뽑아 쓰기 시작하면서 둠벙 쓸 일이 점점 없어졌다. 물길이 끊긴 둑에선 고마리, 며느리밑씻개들이 오종종한 밥풀 꽃을 여전히 피우고 있다. 

밤나무
밤나무

한 바퀴 돌아서 석거리로 내려오는 길가 밤나무에 알밤이 고개를 내민다. 날카로운 가시 속에 어찌 이리도 얄미운 열매를 토실토실 품고 있을까? 제아무리 단단한 가시방석을 둘러치더라도 때가 되면 스스로 문을 열고 나오는 자연의 이치!

각시그령
각시그령

유년의 허기진 기억을 감싸 안은 덕석골을 등지고 세상을 바라본다. 전원주택 위로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유려한 선을 그린다. 저 멀리 유장한 지리산 능선이 참 맑아 보인다. 언제부턴가 천왕봉을 올려다보길 좋아했다. 아마도 지리산을 사모하여 지리산 자락에 살면서부터일 게다. 토심(土深) 깊은 지리산, 온갖 생명 살려낸 어머니의 산, 일편단심 자식들을 위해 살아오신 어머니! 논둑에는 각시그령이 붉은 깃털을 산들바람에 나풀거리고 있다. 가을 빛깔치곤 너무나 화사해서 마음마저 애련하다.



식물 문화 연구가이자 산림 치유 지도사인 최재길 시민기자는 사남면 죽천 사람이다. 지리산 자락에서 오랫동안 머물다 최근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앞으로 사천의 곳곳을 걸으며 만나는 풀과 나무, 숲 따위를 이곳 ‘야생야화(野生野話)’에서 소개한다. 때로는 그의 추억이나 재미난 이야기도 만날 수 있다.    -‘야생야화(野生野話)’ 소개 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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