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N'과 함께] 아무튼 청년 : 김태호 씨
한국무용가(연지골예술원 대표)

[뉴스사천=하병주 기자] K-팝, K-무비, K-드라마, K-댄스. 아시아 넓은 대륙의 동쪽 끝자락에서 뿜어내는 문화 향기에 세계인이 열광하는 요즘이다. 세상은 이를 ‘한류(Korean Wave, Hallyu)’라 부른다. 이런 날에, 대대로 전해오는 전통 예술을 고집스레 이어가는 예술인의 마음은 어떨까? 그것도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에서 활동하는 예술인이라면? 사천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젊은 한국무용가 김태호 씨를 만나 궁금증을 풀어본다.

한국무용가 김태호 씨. 그가 지난 여름에 대통령상을 수상한 뒤 왈칵 눈물을 쏟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국무용가 김태호 씨. 그가 지난 여름에 대통령상을 수상한 뒤 왈칵 눈물을 쏟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하려면 제대로 하라”

김태호 씨는 지난 6월 26일 전남 무안군에서 열린 제20회 무안 승달 국악 대제전에서 무용 부문 명인부에 이매방류 승무로 참가해 대통령상을 받았다. 그러곤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기쁨의 눈물이라기보단 고마움과 그리움에 사무친 눈물이었다.

 

“제일 먼저 아버지가 떠올랐어요. 아버지는 늘 제가 가는 길을 열성적으로 응원해 주셨죠. 이번 대회에 꼭 나가라고 권유한 분도 아버지세요. ‘살아생전에 네가 대통령상 받는 모습 보는 게 내 소원이야!’ 언젠가부터 이런 말씀을 하시곤 했는데, 그 소원을 더 일찍 이루어드리지 못한 게 죄송했고, 또 이제라도 결실을 거둬서 다행이란 마음도 들었죠. 저절로 눈물이 흐르데요.”

 

김 씨의 아버지는 그토록 바라던 아들의 대통령상 수상의 순간을 이승에서 지켜보지 못했다. 대회가 있기 열흘 전, 앓던 병이 악화해 세상을 떠난 까닭이다. 김 씨에겐 “하려면 제대로 하라”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김태호 씨는 1984년 사천 곤명 완사에서 아버지 고(故) 김구제(1954년생), 어머니 김숙희(1956년생) 두 분 사이에 태어났다. 완사초등학교에 다니다 진주로 옮겨 학업을 이어갔지만, 사천을 아주 떠난 적은 별로 없다.

그가 한국무용에 입문한 건 초등학교 때 율동을 좋아했던 게 계기가 됐다. 진주 동진초에선 무용반 활동을 했다. 한국무용을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시절에 박계현 선생(당시 진주 한량무 이수자)과 고(故) 임이조 선생(당시 남원시립국악단 단장)을 잇달아 만나면서다. 이때부터 대학에서 한국무용을 전공하리란 꿈도 꿨다.

한양대학교 생활무용예술학과를 졸업한 김 씨는 경북도립국악단에서 상임 단원으로 3년 가까이 활동한 뒤 사천으로 돌아왔다. 고향의 문화예술 발전에 조금이나마 이바지하고픈 마음에서다. 사천문화재단에서도 일했고, 가산오광대 전수교육관에서 문화예술 교육사로도 활동했다. 지금은 고성 농요 전수교육관의 문화예술 교육사이면서, 경상국립대 민속무용학과 강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는 사천에서 춤꾼으로 살아가기가 어떤지를 묻자 멋쩍은 웃음부터 지었다.

 

연지골예술원의 표지석 앞에 선 김태호 씨.
연지골예술원의 표지석 앞에 선 김태호 씨.

사천에서 춤꾼으로 살아가기

“그거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엄청 어렵죠. 지방이라 더욱 그렇고, 무용이라 특히 더 그런 것 같아요. 한국무용이 대중성이 떨어지니까 예술 활동으로만 먹고살기가 힘든 거죠. 레슨이나 교육 프로그램 참여로 벌이를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지방에선 그런 기회마저 별로 없어요. 저야 연습 공간이라도 있어 다행이지만…….”

 

그나마 김 씨 자신은 다행이란 얘기다. 연지골예술원이란 공간이 고향 땅 완사에 마련돼 있어서다. 이 공간도 돌아가신 그의 아버지가 선물했다.

 

“어찌 보면 저는 아직 캥거루족이에요,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으니. 솔직히 그게 도움이 되죠. 하지만 경제적으로 독립해야겠다는 생각은 강한 편이에요. 그래서 늘 습관처럼 기관을 반쯤 끼고 일을 해요. 경상대 인문도시사업단이나 사천문화재단 같은 곳에 발을 걸쳐 놓고 예술 활동을 하는 거죠. 내가 꼭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지만,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닌 것 같아요.”

 

지방에서 한국무용가로 살아가기가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서울은? 김 씨는 한때 서울행을 꿈꾸기도 했으나 마음을 고쳐먹었단다.

 

“지방에 머무니까 왠지 뒤처지는 듯한 느낌도 들고 해서 ‘서울로 가야 하나?’ 이런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그때마다 겁나더라고요. 서울에는 예술 천재들이 많고, 경제적 부담도 크니까요. ‘용 꼬리보다 뱀 대가리가 되자’하고 처음에 마음먹은 대로 돌아가게 돼요. 실제로 지역에선 물심양면으로 돕는 분이 많아서 버틸 수가 있거든요.”

 

어쨌거나 김 씨는 최근 한국무용 부문에 대통령상을 받으면서, 사천이란 지역을 바탕으로 활동한 지난날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나아가 앞으로는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창작 춤극으로 꾸며보고픈 바람도 갖게 됐다.

 

“사실 제가 애향심이 꽤 강한 편이더라고요. 우리 지역 이야기를 무대에 올려 보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하고 있어요. 창작극을 만들기에 아직 실력이 부족하다는 마음도 있지만, 천천히 실행에 옮겨 보려고요. 혹시 압니까? 사천의 이야기로 서울을 오갈 수 있을지?”

김태호 씨에게 대통령상의 영예를 안겨 준 승무의 한 장면.
김태호 씨에게 대통령상의 영예를 안겨 준 승무의 한 장면.

한국무용가 김태호의 꿈

사천의 이야기로 창작 춤극을 만든다는 얘기는 그만큼 지역민들이 한국무용이나 전통 예술에 관한 이해도가 높음을 뜻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떨까. 그저 전해 내려오는 옛것일 뿐 새로움은 별로 없다고 인식하진 않을까?

 

“그런 부담이 없는 건 아녜요. 한국무용을 단순히 동작의 이해로만 본다면 어렵고 재미가 없거든요. 흔히 한국무용을 ‘감정을 춤의 장단에 얹어서 물 흐르듯 풀어내고 표현하는 것’에 비유하는데, 결국 음악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거죠. (故)임이조 선생께서도 ‘음악과 춤이 합일되는 순간 객석에서 저절로 얼씨구 하고 추임새가 터져 나온다’라며 강조하셨죠. 이게 한국무용의 멋이자 매력인 것 같습니다.”

 

한량무를 추는 김태호 씨.
한량무를 추는 김태호 씨.

악가무일체(樂歌舞一體)란 말이 있다. 음악과 노래와 춤이 하나로 어우러져 감흥이 꼭대기로 치솟을 때를 일컫는 말일 테다. ‘장단에 따라 춤이 달라지고, 춤에 따라 장단이 달라진다’라는 말도 있으니, 그만큼 춤과 음악은 떼려야 뗄 수 없음이다. 김태호 씨는 그런 한국무용의 멋을 지역민들에게 더욱 알리고 싶다. 승무, 살풀이춤, 교방살풀이춤, 한량무, 입춤, 일무 등으로! 

 

“대통령상을 받았다고 곧 명무(名舞)가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제가 스스로 만족할 단계에 이르러야 하겠죠. 특히 ‘임이조 선생의 춤을 잘 춘다’라는 평가를 꼭 듣고 싶어요. 이를 바탕으로 지역민들에게 다가가고 싶습니다. 그게 가르침을 준 선생님께도, 저를 품어 준 지역민들께도 보답하는 길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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