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야화(野生野話)] ③수청숲

 

수청숲
수청숲

태풍이 지나간 뒤 수청리 마을숲에 나섰다. 숲을 비켜 흐르는 강물이 많이 불어있다. 강바닥의 달뿌리풀은 납작 엎드렸다. 달뿌리풀에게 며칠 정도 굽히는 건 문제도 아니다. 물이 빠지고 나면 성글어진 몸집을 툴툴 털고 다시 일어선다. 이 풀이 거칠고 험악한 강바닥에서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다. 

얼마 전까지는 강에 달뿌리풀이 무성했다. 물풀이 가득한 냇가에는 흰뺨검둥오리, 쇠백로, 검은댕기해오라기가 노니는 한가로운 풍경이었다. 이제 한동안 이런 한가로움은 사라졌다. 큰비는 막혀있던 것을 뚫어주기도 하고 안정된 것을 흩어 놓기도 한다.

흰뺨검둥오리
흰뺨검둥오리

거칠어진 물살에 흰뺨검둥오리들이 강물 안쪽으론 들어가지 못하고 가장자리 물풀에 모여있다. 강물 한가운데서 갑자기 흰뺨이 한 마리가 발버둥 치며 물살을 거슬러 오른다. 무리가 쉬고 있는 곳으로 가려는 듯 보인다. 순간 ‘날아오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하는데, 물살에서는 도움닫기가 안 되나 보다. 연속 동작을 하려면 그전에 준비 자세가 필요하다.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어려움을 겪는다.

마을숲에는 장구한 나무들이 사천강변을 따라 한 줄, 두 줄로 길게 늘어서 있다. 느티나무, 해송, 왕버들 등. 1940년쯤 마을 사람들이 홍수를 막으려고 둑을 쌓고 이 나무들을 심었단다. 80여 년 전이니 마을 어르신들의 기억에 또렷한 숲이겠다.

숲 들머리의 느티나무 앞에 섰다. 그동안 나무의 껍질을 바라보는 일에 흥미를 느껴왔다. 나이를 많이 먹은 나무일수록 색다르고 재미있는 문양이 드러난다.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왕버들은 왕버들대로 느티나무는 느티나무대로 고유한 문양과 질감을 지닌다. 저마다의 고유한 색깔! 나이를 많이 먹을수록 아름답고 기품있는 나무들! 

이끼는 육상에 식물이 살 수 있게 바탕을 만들어준 개척자다.
이끼는 육상에 식물이 살 수 있게 바탕을 만들어준 개척자다.

그러나 나무에 이끼가 끼면 느낌은 또 달라진다. 이 이끼를 지의류라 한다. 습기가 꿉꿉하니 지의류는 춤을 춘다. 아주 오래전 메마른 땅에 옷을 입혀준 지의류(地衣類). 육상에 식물이 살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준 개척자다. 지의류는 나무뿐만 아니라 바위 겉에도, 히말라야 고산지대나 남극 같은 극한의 땅에서도 보란 듯이 살아간다. 하지만 생태환경이 파괴된 곳에서는 살지 못한다니! 개척자의 천성이 참 야생답다. 마을 안으로 걸어 들어가니 시멘트 담벼락에도 야생의 자연이 스며들었다. 인공의 틈바구니에도 세월이 가면 자연이 아름다운 붓질을 한다. 

시멘트 건물 벽에 잔뜩 앉은 이끼
시멘트 건물 벽에 잔뜩 앉은 이끼

지의류는 오래전에 조류와 균류가 동거하는 형태로 진화했단다. 바다에서 올라온 조류가 균류와 공생을 하면서 살아남게 된 거지. 조류는 광합성을 해서 탄수화물을 주고, 균류(곰팡이)는 물과 질소를 모아 준다. 전혀 다른 둘이 서로 부족한 것을 나누는 장면이다. 이 낯선 생명조합은 지혜롭게도 경제적 독립을 이루었다. 그리고 대기에 산소를 내뿜기 시작했다.

느티나무 열매
느티나무 열매

숲 바닥에서 바람에 떨어진 느티나무 가지 하나를 주워들었다. 풋열매가 잎겨드랑이마다 하나씩 매달려 있다. 그런데 열매가 달린 가지의 잎은 눈에 띄게 작다. 바로 곁의 열매에 양분을 공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신을 키울 틈이 없었지! 식물의 잎은 아무리 봐도 엄마와 같은 존재다. 다시 느티나무 열매다. 혹 이 열매를 눈여겨본 적이 있을까. 세모꼴 동글납작한 모양. 너무 작아서 일부러 찾아보지 않으면 있는지도 모른다. 이 작은 씨 한 톨이 천년을 살아서 신령스러운 정자나무가 된다니! 

개구리
개구리

지의류가 그랬고 느티 열매가 그랬듯 새롭고 장엄한 세상은 작은 것에서 비롯된다. 자연은 얼마나 변화무쌍하고 경이로운 연속선상에 있는가? 개구리 한 마리가 나무탁자 위에 앉았다, 마치 무슨 생각에라도 잠긴 것처럼.

 

식물 문화 연구가이자 산림 치유 지도사인 최재길 시민기자는 사남면 죽천 사람이다. 지리산 자락에서 오랫동안 머물다 최근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앞으로 사천의 곳곳을 걸으며 만나는 풀과 나무, 숲 따위를 이곳 ‘야생야화(野生野話)’에서 소개한다. 때로는 그의 추억이나 재미난 이야기도 만날 수 있다.    -‘야생야화(野生野話)’ 소개 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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