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N'과 함께] 이달의 인물 : 신원화 사천시청 여자농구단 감독

[뉴스사천=하병주 기자] 옛 삼천포시와 옛 사천군이 하나로 합쳐 사천시로 거듭나기 전, 그 언제부턴가 삼천포시는 ‘농구 도시’로 이름을 떨쳤다. 1984년 미국 LA 올림픽이 끝난 뒤, 또는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여자 농구대회를 마치고 도심을 가로질렀던 농구 선수단의 카퍼레이드 장면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이다. 예전 같진 않다지만, 그 ‘삼천포 여자농구’가 ‘사천 여자농구’로 이름을 바꿔 존재감을 이어가고 있다. 5월에 열린 2022 전국실업농구연맹전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사천시청 여자농구단의 중심에 있는 신원화 감독을 만난다.

'여자농구 메카, 사천'을 지켜가는 신원화 사천시청 여자농구당 감독이 선수들과 훈련 중 잠시 자세를 잡고 있다.
'여자농구 메카, 사천'을 지켜가는 신원화 사천시청 여자농구당 감독이 선수들과 훈련 중 잠시 자세를 잡고 있다.

여자농구의 중심은 사천
신원화 감독 소개에 앞서 먼저 살필 것은 사천시청 여자농구단이다. ‘여자농구 메카, 사천’을 부르짖으며 2003년에 창단했다. 2004년에 전국 종별 농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거둔 데 이어 2006년에는 아마추어 대회의 꽃 ‘전국체전’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국민의 관심이 프로농구로 옮겨가고, 선수들도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사천)을 눈여겨보지 않는 가운데서도 사천시청 여자농구단은 옛 명성을 이으려 애썼다. 결과는 성적이 말해준다. 실업 여자농구단이 전국에 4개뿐이라지만, 사천시청의 성적은 늘 우승 아니면 준우승이었다.

최근의 성적은 더욱 놀랍다. 코로나19 감염병이 생기기 전인 2019년, 전국체전 제100회 대회에서 영광의 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2021년에는 실업농구연맹전과 종별농구선수권대회를 잇달아 우승했다. 코로나19 탓에 2020년엔 아무런 대회도 열리지 못했고, 2021년에도 전국체전이 개최되지 못했음을 고려하면, 지난 3년간 모든 대회에서 우승한 셈이다. 지난 5월에 있었던 실업농구연맹전까지 포함해서다.

이렇듯 뛰어난 성적을 자랑하는 사천시청 여자농구단에서 신 감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처음엔 플레잉 코치(=선수로 뛰면서 코치를 겸하는 사람)로 합류했어요. 그때가 2004년으로, 농구단이 막 생겼을 때죠. 첫해부터 전국대회 우승을 차지하면서 농구계에서 관심이 컸던 것 같아요. 2005년부터는 코치로 전념했죠. 사천시가 농구단을 조금이라도 더 챙겨주려 했고, 선수들도 늘 잘 따라줘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가 한참 변방에 있지만, 그래도 좋은 성적을 거두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아요.”

신원화 사천시청 여자농구당 감독이 훈련중인 선수들을 지켜보고 있다.
신원화 사천시청 여자농구당 감독이 훈련중인 선수들을 지켜보고 있다.

신원화 감독의 농구인생
이렇듯 신 감독은 공(功)을 딴 곳에 돌리지만, 사천시청 여자농구단의 오늘이 있기까지 그의 역할이 적지 않았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신 감독의 이런 열정엔 그가 삼천포에서 태어나 삼천포에서 농구를 배웠다는 배경도 담겨 있다.

신원화 감독은 1974년 실안동에서 태어났다. 옛 실안초등학교 4학년 시절, 키가 크고 운동신경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농구부 활동을 권유받았다. 곧 농구부가 있는 삼천포초등학교로 전학해 운동을 시작했다. 6학년이 되던 해, 삼천포초 농구부는 전국소년체전에 경남 대표로 참가해 우승을 차지했다. 이 우승에 신 감독도 크게 이바지했음은 물론이다.

1986년 삼천포초등(국민)학교 여자농구단이 전국대회 우승 뒤 카퍼레이드하는 모습.(사진=신원화 감독)
1986년 삼천포초등(국민)학교 여자농구단이 전국대회 우승 뒤 카퍼레이드하는 모습.(사진=신원화 감독)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훌륭한 선생님을 만났던 것 같아요. 강일동·김기준 코치님을 차례로 만났는데, 모두 기본기에 충실히 하라고 강조했죠. 당시에 선수층이 얇아서, 당장 경기에 이기는 데 무게를 두던 분위기에 비하면 분명히 다른 접근이었어요. 덕분에 좋은 성적도 거뒀죠. 전국소년체전을 우승하고 삼천포 시내를 돌며 카퍼레이드를 했던 기억이 엊그제 같네요.”

신 감독이 선수로 뛸 때의 역할은 주로 포인트 가드였다. 포인트 가드는 팀에서 전술적 이해가 가장 높은 선수가 맡는데, 팀의 사령탑 역할이기도 하다. 신 감독의 역할이 그만큼 컸음을 뜻한다.

그는 삼천포여중, 삼천포여고를 거쳐 실업팀(제일은행)에 진출했다. 1998년 여자프로농구가 출범하던 첫해엔 신세계 소속으로 정선민·양정옥 선수(=동기)와 함께 ‘원년 우승’이란 금자탑도 쌓았다. 이듬해엔 국가대표로 뽑히는 영광도 누렸다.

'신세계'의 여자프로농구 원년 우승 확정 뒤 기뻐하는 선수들(가운데가 신원화 선수)
'신세계'의 여자프로농구 원년 우승 확정 뒤 기뻐하는 선수들(가운데가 신원화 선수)

신 감독이 프로 무대에 머문 시간은 짧았다. 2001년 프로에서 은퇴한 뒤 울산에서 대원SCN이라는 실업팀이 탄생하자 플레잉 코치로 참여했다. 그해 또 우승했다. 이때부터 주위에선 그를 두고 ‘우승 제조기’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2002년,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이듬해 출산하면서, 사실상 선수 생활과 결별했다. 이 무렵 자신의 고향에 여자농구단이 탄생해 플레잉 코치로서 다시 한번 우승의 경험을 맛본 건 덤이었다. 그의 농구 인생 제2막의 시작이기도 했다.

“요즘요? 농사로 치면 제일 중요한 시기죠. 프로팀이 선수들과 계약을 끝낸 뒤라 이제 우리 차례거든요. 모두 11명까지 뽑을 수 있지만, 현재 사천시청에는 7명뿐이죠. 그중 1명이 다친 상태라, 지난 대회 우승에 사실 저도 조금은 놀랐습니다. 우리 선수들이 교체할 선수도 없는 상태에서 그만큼 열심히, 잘한 거죠. 선수들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주고 싶네요.”

사천 여자농구여 영원하라!
사천시청 여자농구단에는 현재 황미예(36), 이은혜(33, 주장), 윤나리(33), 나예슬(26), 유현이(26), 홍소리(26), 최민서(21) 선수가 뛰고 있다. 10년 이상 한솥밥을 먹는 선수부터 갓 들어온 새내기까지, 자매들처럼 너무 잘 지낸다는 게 신 감독의 자랑이다. 이렇듯 ‘선배와 후배의 원만한 소통과 배려’는 사천시청 여자농구단이 좋은 성적을 거두는 첫 번째 비결로 꼽힌다.

반면에 신 감독은 “새로운 선수 영입에는 늘 애를 먹는다”라며 어려움도 털어놓았다. 사천에서 가까운 지역에는 선수층이 매우 얇은 가운데, 수도권 출신 선수들이 이곳 사천까지 내려오길 매우 꺼린다는 얘기다. 하긴 농구 아니어도 하고 싶은 게 많을 젊은 선수들에게 사천이 너무 멀거나 좁을 수 있음은 인지상정이다. ‘사천이나 경남 서부지역 출신의 선수를 발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지역 농구계에서 꾸준히 나오는 이유기도 하다. 신 감독도 이 대목에서 힘주어 말했다.

“무엇보다 초등학교 농구가 중요해요. 현재 삼천포초, 삼천포여중, 삼천포여고가 교기로 농구를 정하고 있는데, 아래에서부터 좋은 선수가 올라오지 않으니 여중·여고에선 계속 선수들을 찾아 나서고 있어요. 여고에 이르면 우리 지역 선수는 10명에 2~3명 정도죠. 이게 거꾸로 되어야 하는데…. 제가 어렸을 때처럼 관내 초등학교에서 재질이 엿보이는 선수를 선발해 모은다든가, 아니면 교기로 농구를 채택하는 학교를 늘리든가 하면 좋겠습니다. 지금 삼천포초의 학생 수가 너무 적거든요.”

신원화 사천시청 여자농구당 감독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신원화 사천시청 여자농구당 감독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신 감독의 이 말에는 간절함이 묻어났다. ‘이렇게 가다간 사천 여자농구의 명맥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위기감 같은 게 깔렸다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꿈은 소박하면서도 비장했다.

“얼마 전까지 TV에 여성 연예인들이 농구를 배워 가는 프로그램이 있던데, 이런 게 계기가 되어서 사천에서도 여자농구에 관심이 커졌으면 좋겠어요. 다른 어느 곳보다 사천에 오면 생활 스포츠로 농구가 더 활성화된 느낌을 준다거나, 사천의 농구 역사 기록관 같은 거라도 생기면 더 좋겠죠.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농구단이 계속 유지되길 바랍니다. 제가 떠나더라도 후배들이 설 자리가 있어야 하고, ‘여자농구 메카, 사천’을 이어갈 수 있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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