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일곱에 첫 그림 전시회 여는 박정배 할머니

“코로나19로 노래 교실, 경로당 문 닫아 재미로 시작”
사천노인대학 전시 중…삼천포·곤양서부노인대학은 전시 예정

 

전시회의 주인공인 박정배 할머니
전시회의 주인공인 박정배 할머니

[뉴스사천=정인순 인턴기자] 사람의 재능은 어디까지고 언제 가장 빛을 발하는 걸까. 숨은 재능이 서랍 속에 들었다고 비유한다면, 서랍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열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여기 서랍 속 보물을 꺼내 꿈을 만든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

지난 6월 16일 대한노인회 사천지회 노인대학 강의실 벽에는 꽃과 나무, 나비 등을 그린 그림 40여 점이 전시됐다. 전시회의 주인공은 올해로 87세를 맞으신, 사남면 죽천마을에 사는 박정배 할머니다. 강의 시작에 앞서 전시회의 배경과 작가에 대한 짧은 설명이 끝나자 학생들의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흰 뽀글머리 파마에 순박한 표정의 박 할머니는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박정배 할머니의 작품
박정배 할머니의 작품

코로나19로 깨달은 뜻밖의 재능
1935년생인 할머니는 축동면 원동마을에서 태어났다. 자랄 땐 꿈이란 것도 못 가졌다. 그 시절엔 대체로 다 그랬던 것처럼, 그도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살았을 뿐”이란다. 나이 열아홉에는 사남면 죽천으로 시집왔다.

“(신랑)얼굴도 한번 못 보고 시집왔다 아이가. 전문대까지 나와서 똑똑하고 아는 것도 많은 사람이었는데 몸이 좀 약했지. 내 나이 42살 때 고마 돌아 안가싯나. 그때 아이 다섯하고 시어머니에 시할머니까지 있었다. 우짜끼고, 그때부터는 농사짓고 일만 했지.”

박정배 할머니는 뜻밖의 계기로 특별한 재능을 발견했다. 코로나19로 다니던 노래 교실과 경로당이 문을 닫자 이웃과 친구들을 만나는 것이 힘들어졌다. 집에서 홀로 지내는 시간이 많아져 심심하고 우울한 마음을 털어내기 위해 생전 처음으로 그림을 그려 보았다. 달력을 뜯어 뒷면에 볼펜으로 장롱에 나타나 있는 문양을 따라 그림을 그렸다. 할머니의 숨겨진 재능이 세상을 향해 돋아나는 순간이었다. ‘아따 내가 그림에 취미가 있는 긴가?’ 할머니 자신도 놀랐단다.
 

“흰 종이에 밑그림을 그리고 색연필로 색을 입히는 모든 과정이 좋아. 그림에 집중하면 아무런 생각이 없어져서도 좋고. 그림이 다 되면, 뿌듯한 느낌도 들지.”

박정배 할머니 작품
박정배 할머니 작품

2년에 완성한 그림책 세 권
그림에 재미를 들인 할머니는 마당 한 켠 오도카니 선 풀꽃이나 들에 핀, 작은 꽃들을 그림에 옮겨 담기 시작했다. 깃털 선명한 닭과 새, 화려한 나비, 그리고 상상 속 존재들을 그림으로 붙잡았다. 할미꽃, 엉겅퀴, 붓꽃, 참새, 수탉, 병아리, 나비, 민화 속 호랑이 등 할머니의 그림 속 소재는 다양하다. 전문적이지 않은 터치가 그림 속 주인공들을 더욱 친근하게 만든다.

할머니가 유독 아끼는 건 노란 저고리에 댕기를 예쁘게 땋은 새색시 그림이다. 둘째 손녀를 생각하며 그렸단다.
할머니가 유독 아끼는 건 노란 저고리에 댕기를 예쁘게 땋은 새색시 그림이다. 둘째 손녀를 생각하며 그렸단다.

그중 할머니가 유독 아끼는 건 노란 저고리에 댕기를 예쁘게 땋은 새색시 그림이다. 둘째 손녀를 생각하며 그렸단다. 그림 속 새색시는 해맑게 웃고 있다. 금방이라도 붉은 치맛자락을 사그락거리며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올 것 같다. 다른 그림 속 주인공도 다들 행복해 보인다는 게 박 할머니 그림의 특징이다.

그림을 한번 그리기 시작하면 중간에 쉬지 않고 끝을 본다는 건 할머니의 그림 그리기 습관이다. 농사일하던 버릇이 몸에 밴 까닭이다. 그림을 시작한 지 2년 남짓, 어느새 할머니의 그림책은 세 권으로 늘었다.

박정배 할머니 작품
박정배 할머니 작품

서랍 속 보물을 꺼내다
“전시회는 무슨! 함부래, 남부끄럽다.”

어머니의 그림을 뒤늦게 본 둘째 아들이 전시회 이야기를 꺼내자 할머니는 손사래부터 쳤다. 하지만 정작 전시회가 코앞에 다가오자 “이런 걸 할 줄 알았으면 신경 써서 더 잘 그릴걸” 하며 아쉬움도 드러냈다.

“처음 어머니 그림을 봤을때, 깜짝 놀랐어요. 어머니에게 이런 솜씨가 있는 줄 전혀 몰랐거든요. 그저 자랑스럽죠. 건강하게, 즐겁게, 오래도록 그림을 그리시면 좋겠습니다.”

아들은 어머니가 낙서처럼 그린 그림까지 모두 소중하게 보관한다며 어머니에 대한 애정을 표했다.

서랍 속 보물을 발견하고도 내버려 둔다면 가치 없는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꺼내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으로 만드는 일은 결국 자신의 몫이다. 

박정배 할머니의 그림은 6월 26일까지 대한노인회 사천지회 노인대학에 전시된다. 이후 삼천포노인대학, 곤양서부노인대학에도 전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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