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륜휘 작가
구륜휘 작가

[뉴스사천=구륜휘 작가] 남도에는 바람이 분다. 나뭇잎이 머리를 처박고 흔들린다. 누군가는 나무의 맨 꼭대기가 별처럼 생겼다고 했다. 오늘은 별이 쏟아지는 날이었다. 짧은 치마를 입고 소파에 누워있던 네게 겨울 조끼를 덮어주던 여름이 온다. 너의 분열된 자아들이 소란을 피우는 여름이 왔다. 괴로운 너의 두 번째 계절은 머리를 처박고 달려왔다. 내 마음 속은 온통 H로 가득하다. 분열된 너의 자아는 이미 나를 찾아왔다. 멀리 삼천포에 도달했다. 

나를 언니라고 부르는 네가 낯설지 않았다. 후배들이 나를 언니라고 부르면 고개를 숙이고 못들은 척 신발로 땅을 차곤 했다. 막내로 있던 내가 좋아서 그랬다. 또 내가 후배들보다 나이가 위에 있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근데 H에게 나는 언니였다. 

“언니. 나도 나이가 들면 언니처럼 될 것 같아요.” 나는 그 말이 우스웠다. 이렇게 예쁜 H가 나같아질까봐 자기연민에 빠져 허우적 될까봐 웃음이 나왔다. 그 말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제발 그렇게 되지 말아달라고 빌었다. 자존감이 높은 어른이 되라고 자존심만 내세우는 자신이 되지 말라고 간절히 소원했다.

H가 떠오른 건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사람과 어울릴 수 없는 사람이라며 스스로를 포기하고 있었다. 나는 요즘 길거리를 가득 메우는 유세차량의 소리들에 시달리고 있다. 지방선거의 열기는 정치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소리로만 가득했다. 유세차량은 혼자서 울었고 혼자서 화를 내고, 혼자서 웃었다. 온통 자기 확신과 자기 자랑으로 가열 찬 요란한 빈수레였다. 

H의 소식에 나는 “사람들은 사람 같아” 되뇌는 나를 보았다. 자존심은 없어도 자존감은 누구보다 단단한 사람이었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우리는 둥글게 굴러 다닐 수 있었다. 온 세상을 온 사람같이 말이다. 

“존경하는 사천 시민 여러분.” 유세 차량이 또 지나간다. 트로트에 자신의 이름을 박은 노래도 흘러나온다. 사람 같은 사람말고 절망하는 사람이 당선되었으면 좋겠다. 희망을 노래하는 비약적인 사람 말고 절망을 절망같이 인사하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선거 기간에만 노래하는 사람 말고 인생이 노래인 사람이 정치를 했으면 좋겠다. 

오늘도 나의 작은 방에서 젤소미나는 웃고 있다. 영화 <라 스트라다>에서 젤소미나를 보며 나를 닮아 깜짝 놀랐다. 온 세상에 울고 웃는 것 밖에 할 줄 모르는 젤소미나는 나를 닮았다. 우울증에 걸린 지도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우울해서 하루 종일 땅바닥만 쳐다보는 정치인이 있었으면 좋겠다. 말보다 몸짓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이 진솔하지 않을까?

누군가의 장례식장에 나타나거나 누군가의 결혼식장에 나타나서 말로써 자신을 과장하는 사람 말고. 
H에게 말했다. “비극이 편할 때도 있지. 다만 허전하다면 메꿔보자.” 자존심보다 자존감이 강한 우리는 할 수 있다. 자기 자랑과 위선으로 가득한 자존심만 부리는 사람 같은 사람과 우리는 다르다. 아프다. 이 여름이 아프다. 바람이.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이 아프다. 서로를 뺨 때리며 히죽되는 나무가 아프다. 남도에는 바람이 분다. 

계속 부는 바람에 나뭇잎이 말한다. ‘나무는 ㅋㅋㅋ하고 웃지 않는다.’*

* 김금희, <너무 한낮의 연애>, 문학동네,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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