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섭 시인.
송창섭 시인.

[뉴스사천=송창섭 시인] 입춘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한 달이란 시간이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훌쩍 사라졌습니다. 한동안 바람이 매섭게 불고 기온이 내려가 추위에 몸을 오그리며 떨어야 했습니다. 꽃 피는 춘삼월이라지만 2월이면 이미 들녘과 나뭇가지에는 봄의 정령과 징후들이 어김없이 나타납니다.

남녘땅 따스한 마을, 한쪽 밭에는 해풍을 먹고 자란 마늘이 한창 영글고 이웃한 밭에는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 막바지 시금치를 캐느라 손놀림이 분주합니다. 산과 들에는 매화가 환한 세상을 그리며 꽃망울을 터뜨립니다. 길가에서 마주한 홍매화 짙붉은 잎은 타오르는 젊은 혈기요 정열적인 환희며, 언어가 아닌 천연 물감으로 빚은 자연의 시(詩)입니다. 듬성듬성 서먹하게 피어난 유채꽃 또한 반가운 사랑입니다.

길의 위쪽과 아래, 길섶에는 아직까지 갈색 마른 덩굴과 잎들이 수북이 쌓여 있습니다. 그 속에는 참새, 딱새, 유리딱새, 멧비둘기, 까투리, 장끼가 추위를 피해 머무르다가 옮겨 다닙니다. 마른 덤불에 가려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둔덕이나 밭기슭을 톺아보면 어린 쑥이 하나 둘 머리를 내밀며 봄기운을 전합니다. 발 빠른 아낙은 그새 엉덩받이를 차고 호미나 작은 칼로 어린 쑥, 달래, 냉이 캐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봄 처녀, 봄꽃 처녀 또한 그렇게 찾아옵니다.

3월을 두고 인디헤나는 읊조립니다. ‘한결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달(아라파호족),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달(체로키족), 연못에 물이 고이는 달(풍카족), 잎이 터지는 달(테와 푸에플로족), 바람이 속삭이는 달(호피족)’이라고. 그들의 심성에는 풍요롭고 다양하며 서정성 짙은 시적 요소가 서려 있음을 보여줍니다.

갯바위가 내려다보이는 벼랑길, 비탈길을 스칠 때면 멀리 외출했다 귀향하는 힘찬 물결들을 만납니다.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대오를 갖춰 밀려오는 파도는 군악대의 주악에 맞춰 보무당당하게 행진하는 푸른 제복의 군인들 패기와 닮았습니다. 용솟음치는 역동성 앞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와 목표를 새롭게 정립하고 자존감을 기르게 됩니다.

대지의 생명들이 기지개를 켜며 하나같이 저마다의 빛을 발산하며 존재의 상징을 드러냅니다. 자연의 평화로운 질서가 겨울이라는 긴 시간 속에서 내면을 다져 허물을 벗고는 새로운 삶을 위해 꿈틀댑니다. 자연의 품에 안겨 자연이 빚어내는 예술을 완상하다 보면 ‘나’라는 존재는 극히 미미한 생명체의 하나임을 깨닫습니다. 미물보다 애진(埃塵)보다 더 하찮고 시시한 소품임을 느낍니다. 그러고 보면 쪼끄만 참새라 하여 유리딱새라 하여 볼품없이 가엽게 여기는 건 만불성설(萬不成說)입니다.

뒷산 언덕에 올라 솔향기를 맡으며 넋두리를 풉니다. ‘어물쩍거리다 봄을 놓치는 어리석은 짓을 또 되풀이할 셈인가.’ 봄은 엄동설한이 빚은 산고(産苦)의 나이테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봄은 자연이 조탁한 신화의 영역입니다. 봄의 노래는 싱그러움과 설렘이 주제입니다. 나무 밑동에서 움돋이가 나듯 우리 봄날에도 삶의 움돋이를 틔워야 합니다. 차분하게 자신의 구상들을 풀어 나가지 않으면 후회막급입니다. 봄소식이 엊그제 같았는데 어느새 봄은 이별화(離別靴)를 만지작거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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