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삼조 시인.
정삼조 시인.

[뉴스사천=정삼조 시인] 경상대학교 국어교육과에서 퇴직하신 후 몇 년 전 작고하신 여증동 교수께서 생전에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 있다. ‘상(賞)은 비상(砒礵)이다’란 말씀이 그것이다. 다 알다시피 ‘상’은 칭송의 뜻이 담긴 말이고 ‘비상’은 사람을 죽게 하는 약이기에, 이 말을 달리 말하면 ‘죽으려면 상을 받아라’는 뜻과 다름이 없을 것이고, 좀 부드럽게 말하면 남의 칭송을 받기 위한 선행은 진정한 선행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

이 말을 평생 실천하듯이 사신 어른이 계신다. 진주 남강다리 근처 시외주차장 가는 길에 ‘남성당한약방’을 운영하고 계시는 김장하 선생이 그분이다. 선생만큼 보도되기와 상 거부하시는 분은 드무리라 싶다. 선생의 고향은 사천 정동면이고 1944년생이시다. 사천중학교를 어렵게 졸업한 후 진학을 포기하고, 삼천포의 한 한약방에 취업하셨다. 예사 사람이라면 가난한 가세를 원망하고 남의 집에서 고용살이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였을 것인데, 선생은 그러지 않으셨다. 1962년 한약약종상(한약업사) 자격을 취득하신 것이다. 이어 1963년 용현면 석거리에 개업한 한약방은 대성황을 이루었다. 약값도 비싸게 받지 않고 효험이 있다는 소문이 나 약방은 늘 만원상태였다. 자연히 돈이 모였으나, 그 돈은 자신과 가족을 위해 쓰이지 않았다. 약한 사람인 환자에게서 받은 이익을 나를 위해서 쓸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첫 사업은 장학금 주는 일이었다. 지역의 학교들에 연락하여 집안이 어려워 진학을 못 하는 사람들에게 학비를 주었다. 생활비까지도 보조한 일이 많다고 했다. 장학금을 받은 이들에는 헌법재판관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들이 고마움을 표할라치면 선생은 늘 말씀하시기를 ‘갚아야 한다면 이 사회에 갚으라’고 하실 뿐이었다.

장학금 사업과 함께, 1984년에는 재산을 기울여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하셨다. 설립 후에도 학교는 실무자들에게 맡기시고 선생께서는 끊임없이 막대한 운영비만 보조할 뿐 학교일에는 전혀 관여치 않으셨다. 그후, 본관 도서관 체육관 등 모든 시설을 연차적으로 완성하여 1991년 100억 원에 이른다는 학교를 그대로 정부에 헌납하셨다. 이때에 하신 말씀의 요지는 ‘내가 배우지 못한 원인이 오직 가난이었다면, 그 억울함을 다른 나의 후배들이 가져서는 안되겠다는 것입니다’였다.

이외에도 1990년 진주신문 창간, 1992년 형평운동기념사업회, 남명학연구후원회, 경상대학교남명학관 건립추진위원회 등 각종 문화사업에 돈을 대셨고, 올해 2000년부터 운영해온 ‘남성문화재단’을 해산하면서 그 재산 34억여 원을 경상국립대학교에 기증하셨다. 

선생은 지금도 자가용 차가 없으시다. 가까운 곳은 자전거로 다니신다. 집안 살림을 위해 가정부를 둔 일도 없다. 식구들도 선생과 똑 같은 삶을 사는 셈이다. 어쩐 일인지 요즘 선생의 한약방에 손님이 줄어 걱정이나, 처음부터 지금까지 재산에 마음이 있지 않으니 선생은 걱정이 없으신 듯하다. 선생이 하신 말 중에 이런 말도 있다.

“똥은 쌓아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어버리면 거름이 되어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습니다. 돈도 이와 같아서 주변에 나누어야 사회에 꽃이 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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