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태 막걸리문화촌장
최인태 막걸리문화촌장

[뉴스사천=최인태 막걸리문화촌장] 조선 시대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1681~1763)이 쓴 ‘성호사설(星湖僿說)’ 5권에는 “나는 청명주(淸明酒)를 좋아한다. 양계노인(良溪老人)에게 배웠는데 잊어버릴까 염려하여 기록해 놓는다”라는 글과 함께 청명주 빚는 법이 실려 있다.

경남 진주 진양 하씨 종가에는 하응운(河應運,1676~1736)의 처 인동 장씨가 기록한 ‘호산춘주(壺山春酒)’라는 술 빚는 법이 전한다. 그녀는 경북 구미에 사는 장우극(張宇極)의 딸로 친정에서 전수한 비법으로 빚은 술을 봉제사와 접빈객에 사용했다.

조선 왕조 초기에 궁중의 어의(御醫)인 전순의(全循義)가 ‘산가요록(山家要錄)’이라는 음식 조리서를 썼다. 이때는 아마 ‘약식동원(藥食同源)’이라 하여 ‘약과 음식의 근원이 같다’고 본 모양인데, 이 책에 술 빚는 방법이 63가지가 기록되어 있다.

올해 8월 보물로 지정된 경북 안동의 유학자 김유(1491~1555)가 저술한 한문 필사본 음식 조리서인 ‘수운잡방(需雲雜方)’에는 총 114종의 음식 조리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데, 주류(酒類)가 57종이다.

동아시아 여성이 최초로 쓴 조리서이며, 한글로 쓴 최초의 음식 조리서인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은 1570년경 정부인 안동 장씨(貞夫人 安東 張氏)가 썼는데, 146가지 항목 중에 51종이 술 빚는 기록이다.

이렇게 조선 시대에는 집집이 술을 빚었다. 기록으로 전하는 가양주(家讓酒)의 가짓수가 400여 종에 이를 만큼 술 빚기 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웠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916년 일본제국주의가 총독부의 수탈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주세령(酒稅領)을 공포하면서 우리의 전통주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로부터 100년이 흐른 지금이지만, 슬기로운 선조들의 기록 문화가 있어 우리의 전통주를 다시 복원할 힘이 된다.

수확의 계절인 가을에 온 들판에서 벼를 수확하는 농민들의 손길이 바쁘다. 그런데 풍년가를 부르는 농민이 없다. 387개 막걸리 제조업체의 76.7%가 막걸리 원료로 수입쌀을 사용하고 있으며, 막걸리 매출액 상위 30위권 내 기업의 수입쌀 사용 비율이 82.1%나 된다는 보고가 있다.

이제 선조들의 슬기로운 기록 문화에 쓰여있는 전통주를 이 땅에 되살리고, 조선 시대 집마다 술을 빚었던 가양주(家讓酒) 문화를 다시 꽃피워서 우리 쌀 소비도 촉진하고, 농민들의 주름살도 펴지게 하자.

가을이 깊다. 산도 붉고, 내(川)도 붉다. 뉴스사천 독자님들도 붉기를 두 손 모은다.

 

저작권자 © 뉴스사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