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나무를 통해 본 종자주권 상실의 슬픈 현실

 

▲ 중봉 쪽에서 바라본 덕유산 주봉인 향적봉(1614m)

 

겨울 덕유산(향적봉)을 올랐습니다. 눈 덮인 겨울 산의 정취는 색감의 절제에 있다고 여깁니다.
한국화 중, 남종화의 수묵 농담을 떠올립니다. 흰색과 검정색의 조화.
그래서 겨울 산의 묘미는 차분한 기분에 절제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라고 봅니다.
특히 겨울 산은 사람의 만용이나 흥분을 가라앉히고 겸손과 묵상을 요구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 향적봉 대피소

눈 덮인 산행 길에 초연히 자리 잡고 있는 큰 나무들을 보면 저절로 숙연해지는 기분입니다. 덕유산 겨울 산행 길에 만나는 대표적인 나무가 바로 구상나무와 주목입니다.
수백 년 세월의 온갖 풍상을 온 몸으로 부대끼며 늘 푸르게 서 있는 구상나무와 주목의 자태는 분명 숙연함 그 자체입니다.
▲ 혹독한 날씨일수록 주목과 구상나무의 기품은 오히려 돋보인다. 고사한 나무와 함께 의연하게 서 있는 주목나무.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주목과 구상나무는 나무 자태의 아름다움과 생육 조건의 까다로움으로 인한 희귀성으로 세계 최고의 아름다운 나무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 수령 500여 년의 주목. 주목하면 누구나 살아 1000년 죽어 1000년이라는 구절을 떠올린다. 이처럼 주목은 아름답고 단단한 재질로 최고품질의 가구재로 쓰이면서 생육조건의 까다로움으로 우리 산하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다.
▲ 속살이 파이는 온갖 풍상을 이겨내고도 겨울에 푸르름을 잃지 않은 주목의 의연한 기상.

그 중 구상나무는 오로지 우리나라에서만 자생하는 고유종으로 1000m 이상의 고지대에서만 자랍니다. 우리 산하에 있는 아름다운 나무를 생각하면서 깊은 상념에 잠겼습니다.
▲ 덕유산의 해발 1000m 이상의 고지에서는 이렇게 고사목과 어울린 구상나무 군락지를 쉽게 볼 수 있다.

구상나무와 관련한 종자 주권 상실의 슬픈 역사를 떠 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자 주권과 관련하여 먼저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고려 때(1363년) 문익점 선생이 중국 원나라에서 목화씨 몇 개를 붓대 속에 숨겨 몰래 들여 와 이를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고향에서 재배하는 데 성공하여, 이후 우리나라의 복식 문화를 획기적으로 변화시켰고, 온 백성들을 추위로부터 생명을 지켜 주었습니다.
한 생물종의 씨앗 몇 개가 온 백성의 생활에 혁명을 가져 온 역사적 사실입니다.

웃기지만 역사적으로 우리나라 종자유입 및 반출의 첫 사례가 불법으로 이뤄졌다는데 대해 고소를 금치 못하지만, 오늘 날 우리는 우리 고유 생물자원의 불법적 유출로 인해 경제적 큰 손실뿐만 아니라 나라의 자존심마저 구겼습니다.

유럽에서 크리스마스트리로 큰 인기를 끄는 나무로 구상나무가 단연 으뜸입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가져 간 구상나무를 미국의 아놀드수목원을 비롯한 몇몇 수목원에서 종자개량을 통하여 생육조건을 변화하여 전 세계에 팔아먹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로얄티 한 푼 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구상나무 종자를 가져 가 나름대로 종자개량을 한 후 특허 등록했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오히려 크리스마스트리용 나무를 비롯하여 재배용 구상나무를 역수입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크리스마스 때면 되레 엄청난 양이 국내로 역수입되고 있고 재배용 구상나무는 거꾸로 로얄티를 지불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 바위에 걸터 앉은 구상나무. 강인한 생명력과 함께 아름다운 기품은 나무 중의 나무가 아닐까?

덧붙여, 대표적인 종자유출의 사례를 보여 주는 것이 라일락입니다.
세계적으로 정원수로 이름을 날리는 라일락도 역시 우리나라 자생 식물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1947년 미국인 식물 채집가 미더가 북한산에서 채집해 간 ‘털개회나무’ 씨앗이 품종 개량돼 라일락으로 탄생했습니다. 품종명은 ‘미스킴 라일락’. 자신을 도와준 한국인 타이피스트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라고 하는데, 미국 라일락 시장의 30%를 장악하는 ‘미스킴 라일락’은 1970년대부터 우리나라에도 수입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스킴라일락의 어미인 우리 고유 털개회나무는 오히려 국민들의 의식 속에서 잊혀지고 종자마저 퇴화의 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옛날 명망 높은 양반집에서는 불씨를 소중히 여기고 그 불씨를 꺼뜨리는 것을 망조로 여겼습니다.
털개회나무는 사라지고 오히려 불법 유출된 미스김라이락이 번성하는 현상은 마치 본불씨를 꺼뜨린 양반은 몰락하고 그 불씨를 빌려가 살린 이웃 하인이 출세하여 양반을 괄시하는 양상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우리의 종자 주권 상실의 슬픈 역사를 한 번 되돌아보겠습니다.

‘미국의 국립수목원과 홀덴수목원은 1984~1989년 동안 식물학자들을 한국으로 파견해 950종의 자생 식물종을 자국으로 반입해간 적이 있습니다. 이 일은 유사 이래 가장 큰 규모로 자생종이 해외로 반출된 사례에 해당합니다. 지금으로부터 겨우 20여 년 전의 일입니다. 그 당시 한국의 정부당국이 자생종의 유출을 막기 위해 어떠한 적절한 조치를 취했는지는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한국은 식물 종 보호의 중요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거나, 종 보호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더라도 종자 유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거나 아니면 미국의 행위에 무슨 이유로든 굴욕을 참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보다 더 일찍이, 미국 아놀드수목원은 일제시대인 1917~1919년 식물학자들을 한국으로 파견해 한라산에서 금강산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식물을 샅샅이 조사해 300여종의 식물종자를 채집해간 적이 있습니다.’

이 두 차례의 식물 종 유출은 한국이 겪은 가장 대표적인 종자 유출입니다.
그리고 국제정치무대에서의 주권 상실이 자생종의 상실로 이어진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합니다. 그리하여 지금 한국은 수많은 식물 종을 빼앗겨 그 후유증을 심하게 앓고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이나 종자마저 자원화 또는 산업화 하는 서구자본주의세력의 천박한 태도에 의해 굴욕적인 일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 농가에서 재배하는 고추 딸기 토마토 파프리카 등은 물론이고 각종 과일, 화훼 등 생물자원과 관련된 막대한 로열티 지출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식탁에 오르는 각종 채소 및 과일 어느 하나도 로얄티 없이 생산되는 게 거의 없는 세상이 되었으니 과히 종(種)의 전쟁이라 할 만합니다.

안타깝지만 우리의 종자 주권 상실의 슬픈 역사를 되돌아보고, 다시는 이런 어리석은 과거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우리가 먼저 찾아내고 연구하고, 개발해야겠습니다.
우리의 산하에 있는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 작은 벌레나 새 한 마리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절실합니다.
▲ 다행히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는 덕유산의 오래된 구상나무와 주목을 가족인연을 맺어 보호하고 아끼는 일을 하고 있다. 인연을 맺은 당사자만이 아니라 전 국민이 아끼고 보살펴야 할 우리의 소중한 생물자원이다.

오늘날은 각국이 생물자원의 중요성을 깨닫고 각국의 동식물의 고유성을 지키고 자원화 하기 위해 국제 협약을 맺었습니다.

바로 ‘생물다양성국제협약’인데, 각 국가 소유 생물자원에 대한 주권을 인정한 협약입니다. 1992년 리우회의에서 158개국 대표가 모여 국가간 본격적인 생물종 보호를 위해 서명, 93년 12월 발효됐습니다.

생물자원을 이용한 신품종 개발, 고품질 종자생산, 신약 개발 등은 앞으로 엄청난 부가가치를 생산할 21세기 신 성장 산업으로써 각광 받을 것입니다. 이런 산업은 부가가치가 매우 높은 지식기반산업으로 에너지를 거의 쓰지 않는 녹색성장 시대의 흐름과 맞물려 각국이 심혈을 기울이는 산업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도 지난 몇 년 동안 생물자원 보호와 연구 개발 등에 큰 힘을 기울이고 있어 퍽 다행이라고 봅니다. 지난 8월 29일 환경부는 국외반출 승인대상 생물자원 320종을 추가로 선정했습니다. 한반도 고유종을 중심으로 생태적·경제적 가치가 있는 가는잎향유· 물여뀌 등 식물 100종, 매미나방· 꼬리명주나방 등 곤충 180종, 산천어· 모래무지 등 어류 40종이 포함됐습니다.

우리나라의 자생식물에 대해 해외 반출이 금지된 것은 2001년 ‘국외반출 승인대상 생물자원 지정·관리제’가 실시되면서부터입니다. 지난해까지 528종의 동·식물이 승인 대상으로 지정됐습니다. 승인대상으로 지정되면 환경부장관의 승인 없이 외국으로 생물체는 물론 뿌리, 알, 표본까지 갖고 나갈 수 없습니다. 해외에서의 상업적인 품종 개량도 불가능해집니다. 생물자원 지정관리제는 향후 ‘로열티’ 요구를 위한 근거가 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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