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섭 시인.
송창섭 시인.

[뉴스사천=송창섭 시인] 제대로 된 길도 없고 차량도 없던 시절에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걸어 다녔습니다. 이웃 마을을 가려 해도 냇물을 건너거나 재를 넘어야 했고 먼 길을 에둘러야 했습니다. 소먹이 꼴을 베려 해도 들녘을 지나 한참 산을 오르내려야 했고, 학교에 가려면 최소한 십 리 길은 걸어야 했습니다. 또 머리에 똬리를 얹고 짐이나 물이 가득한 양동이를 인 채 내리꽂히는 땡볕을 쬐며 오랜 시간을 걷는 일은 하도 많아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이렇듯 자신도 모르게 내딛고 다진 걸음이 밑천이 되어 그 흔한 잔병치레 없이 튼실한 몸과 마음으로 살아왔습니다.

오늘 우리는 한번 아팠다 하면 병원과 약국에 의존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주사를 맞고 처방한 약을 먹는데 이게 장난이 아닙니다. 상처를 치유하고 기력 회복에 도움을 준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먹어야겠지만 그 양이 실로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합니다. 외래 환자마다 손에 거대한 짐짝 같은 약봉지를 보따리, 보따리 들고 약방문을 나섭니다. 가능하면 약 복용을 줄이고 이를 대체하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게 만드는 장면입니다.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하루에 적어도 만 보는 걸어야 한다 해서 너도나도 허리춤에 차기 시작한 만보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러 짬을 내어 걷지 않는 이상 하루 만 보 걷기란 만만치 않습니다. 하루를 보내면서 걷기 시간을 따로 확보해야 달성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만 보를 채우지 못하더라도 꾸준히 걷는 습관을 가지는 일입니다. 걸으면서 흘리는 땀은 노폐물, 중금속, 발암물질 등 다양한 유해 물질을 배출하기에 건강 증진은 물론 기분 전환에도 도움을 줍니다. 

‘길을 걷는다’는 말은 함께하는 길벗과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서로의 내면세계를 하나씩 알아가는 과정인 셈이지요. ‘길을 걷는다’는 말은 자연과 소통을 하며 교감한다는 뜻입니다. 새 소리를 듣고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를 듣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봅니다. 흔들리는 잎 틈새로 언뜻 비치는 햇살이 생의 가치를 깨닫게 합니다. 유월, 지금이면 산딸기의 달콤함을 오디의 싱그러움을 거무스름한 버찌의 시큼함을 맛보기에 더없이 좋습니다. 이 꽃은 지고 저기 저 꽃은 새롭게 피는 계절의 미감 역시 읽기에 ‘딱’입니다.

‘길을 걷는다’는 말은 또한 자신의 삶과 시간을 반추해 보는 고독하고 평온한 수행입니다. 맨발로 숲속의 흙을 밟거나 반들반들한 자갈을 밟으며 천천히 옮기는 걸음걸음을 음미합니다. 슬픈 사랑을 아름다운 죄라고 되뇌어 봅니다. 발바닥은 마치 우편배달부 마리오 히메네스가 되어 뭔가 색다른 느낌을 전해 줍니다. 잃었거나 잊었던 자아를, 혹은 자신감을 상실한 자아를 되살리는 기회를 마련해 줍니다. 게다가 조금씩 살이 빠지는 효험까지 얻는다면 그건 덤입니다.       

자신의 허물어진 삶을 되쌓기 위해 걷기를 시작하는 건 첫 삽을 뜨는 소중한 작업입니다. ‘길을 걷는다’는 말은 자신이 그저 존재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분명 살아있음을 알리는 선언입니다.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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