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호(사천시 향촌동)
이용호(사천시 향촌동)

새해 들어 제법 겨울답다. 예부터 겨울은 겨울다워야 한다고 했다. 병충해도 죽고 봄의 생명력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우리는 이미 얼어붙은 지구를 경험하고 있어 이번 추위가 달갑지 않다. 거실 화초들이 파릇파릇 움트는 모습을 보니 까마득히 잊혀져간 일상이 겹쳐진다.

움츠린 시간만큼 확 늘어난 몸무게에 위기감을 느낀다. 실내운동으로 풀어보지만 역부족이다. 결국 밖으로 나가야 하지만 코로나19가 걱정이다. 웬만한 명소나 공원은 폐쇄 상태다. 어딜 가든 인파를 경계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래도 나서보기로 한다. 최대한 개방된 곳, 길이 넓어 교차 접촉이 적은 곳, 그리고 무엇보다 마스크를 벗고 탁한 폐부의 숨을 교환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덧붙이자면 너무 높거나 숨의 평온을 저해하는 곳은 피하되 시선의 호강을 안겨줄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그러나 어차피 이런 명당은 나만의 유토피아가 아닐 테지만.

다솔사로 향한다. 나선 김에 보안암석굴까지 찾아 새해 소망하나 빌고 오고자 함이다. 마스크부터 챙긴다. 따스한 생강차와 견과류 그리고 불전에 올릴 성금 몇 푼까지. 두둑한 털모자와 장갑과 발목토시까지 완전무장하고 나니 히말라야 등반을 방불케 하는 정체미상의 외계인 같다.

운석이 떨어진 듯 환한 햇살이 송림을 잠식했다. 스멀스멀 깨어나는 숲길사이로 복면을 한 침묵의 발길들이 삼삼오오 이어진다. 박하 같은 상쾌한 솔향이 폐부를 누빈다. 지친 눈초리를 건강한 발걸음이 깨우는 시간이다. 추위를 견디며 마천루처럼 솟구친 소나무의 기상이 느껴지는 길에서, 겨울이 되고서야 푸른 인내와 의리를 보여주는 소나무의 귀한 의미를 세한도에 담아 전한 추사의 마음을 만나다. 현실의 우리와 다름 아니다. 1Km남짓 호젓한 공간을 넘어 다솔사에 앉는다.

적멸보궁 뒤 사리탑엔 합장한 소망들이 염주처럼 이어진다. 차밭이 우려낸 맑은 햇살이 움츠린 어깨를 녹여준다. 제 각각의 자리에서 중생을 교화하고 영혼을 위무하는 전각들의 조화가 아름다운 다솔사에서 작은 방역수칙 하나라도 묵묵히 지키는 마음들의 희망찬 내일을 본다. 보안암에 오른다.

온통 복면 쓴 사람뿐이다. 눈만 겨우 드러낸 얼굴에는 경계의 눈초리가 역력하다. 마스크를 벗고 걷다가 인기척이 들리면 바로 마스크를 눌러쓰는 모습이 낯설고 야속해 보인다. 아예 비탈면에 올라서거나 고개를 돌린 채 외면해버리는 분들도 간혹 있다. 휴게의자나 산책로는 텅 비어 있다. 체육시설도 혹여나 묻어있을 바이러스 때문인지 만지는 사람조차 없다. 그러나 멀찍이 스치며 인사를 건네거나 눈 맞춤하기도 하고 좁은 길을 양보해주는 등 온정의 마음이 느껴져 다행이다.    

보안암석굴 앞에 선다. 투박하면서도 은은한 자태가 인자하다. 새해 소망을 비는 민초들의 합장이 이어진다. 소박한 간절함이 쌓이고 모아지면 머잖아 희망의 미소가 퍼지리라 믿는다. 찬바람을 머금은 풍경의 울림이 따스하게 안겨온다. 웅크린 무릎들이 하루빨리 펴지길 소망한다.

전대미문의 마스크 복면 일상에 갇혀있지만 건강을 다지며 위기를 치유하고 극복하려는 긍정의 노력들이 움트는 길에서, 막힘없이 서로와 서로를 잇는 희망의 가도(街道 : 탄탄대로의 큰길)가 확산되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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