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삼조 시인.
정삼조 시인.

지난주 『뉴스사천』의 머릿기사로 ‘10년 만에 진실화해위 출범/ 사천 민간인 학살 규명될까’라는 제하의 기사가 실렸다. ‘이제 그만큼 했으면 됐지 않느냐, 현재 먹고 살기도 바쁜 마당에 미래지향적인 일을 해야지 괜한 일에 돈과 인력을 허비하느냐’는 늘 듣던 반론도 있겠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이런 핑계로 그만둘 수는 없다는 데에 이 위원회가 발족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역사의 정리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미룰 수 없는 일이다. 과거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으면 현재와 미래도 그 길이 구부러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박재삼 시인의 수필집 열 권 중 그 첫 번째인 『슬퍼서 아름다운 이야기』에 나오는 「노산의 어린이 놀이터」에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인민군이 삼천포에 들어오기 전 사람들은 전화(戰禍)를 피해 피난을 갔는데 박재삼 시인 일가는 신수도를 택해 피난했고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기에 배를 얻을 수 있으면 노를 저어 수시로 삼천포 집에 들러 필요한 것을 챙겨가곤 했던, 그즈음의 이야기다. 좀 길더라도 원문을 그대로 인용한다.

“그런데 뭍으로 다녀오신 어머니가 밤중에 총소리를 많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바로 바닷가의 조그만 노산이라는 곳에서 나는 총소리를. 전투를 하는 것 같지는 않고 하여간 총소리가 한동안 요란하더라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 밤 보도연맹원을 끌어내다 총살했다는 것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무언가 뭉클했다. 그제나 이제나 나는 느껴워 한다. 보도연맹원의 무더기 총살에서 우리 민족이 특수하게 겪어야만 했던 사상적 대립에 대한 원한을. 아시다시피 보도연맹원은 그 전력이 비록 좌익이었다 할지라도 개과천선하라는 뜻에서 모인 단체요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을 정부가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뜻에서 그 단체는 생겨나지 않았던가. 정부가 그런 사람들을 충분히 보호하고 인도하기에는 그 기간이 너무 짧고 또한 불의불식간에 시급한 난을 당하고 그리하여 곳곳에서 보도연맹원의 배반이 있었던 데서 취해진 특수 조치라 할지라도 나는 그 총살의 이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수긍할 수가 없는 것이다.”

위 수필은 ‘이후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여 노산에 갈 수 없었다’거나 ‘세월이 지나 이 노산에 어린이 놀이터가 생기고 경로당이 생겨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수필의 마지막은 다음 문장이다.

“그냥 불어오는 솔바람 소리가, 또는 햇빛이, 또는 한송이의 들꽃이 내게는 무심하지 않다.”

이 수필집은 1977년에 나왔다. 서슬 푸르던 유신 말기다. 반공의 기치 아래 좌익을 무조건 죄악시하던 시절에 박재삼 시인은 당시 권력자들의 심기를 건드릴 발언을 서슴지 않은 것이다. 

아직도 좌익이나 우익이니 하여 굳이 편가르기를 하려는 사람들이 있는 듯하다. 우익 좌익을 따지기 전에 어떤 일이 옳았느냐 글렀느냐를 가지고 바른 판단을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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