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는 사천의 역사와 문화 이야기: 사천의 청동기문화

사천에 유난히 많은 청동기 시대 유적들

향촌 세력과 ‘국제무역항’ 늑도와의 관계는?

정동 신월마을의 ‘철’이 향촌 세력과 만나다

사천을 대표하는 청동기 유적이 있는 늑도. 그 옛날 남해안을 주름잡았던 세력이 있던 곳이다.
사천을 대표하는 청동기 유적이 있는 늑도. 그 옛날 남해안을 주름잡았던 세력이 있던 곳이다.

1859년 영국 박물학자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하기 전까지는 ‘모든 생물은 신이 만든 것이므로 모양이나 성질이 변하지 않는다’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밝히길 “생물은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구조가 간단한 생물에서 차츰 세대가 바뀌면서 조금씩 변해 온 것”이라고 했다.

현생인류 이전의 변천 과정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호모하빌리스 이후에 호모에렉투스 그리고 호모사피엔스로 이어져 왔다. 거창한 인류의 진화과정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구석기와 신석기를 지나 청동기 시대에 이르게 된 인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시대는 기록으로 남은 것이 거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대의 삶을 고고학에 의지해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다.

청동기 시대를 알려주는 자료들은 고인돌 몇 기, 토기 파편 몇 점, 돌칼, 돌도끼, 움집터, 기둥 구멍, 돌무덤 등이다. 보통은 일반인들이 궁금해하지 않고 잘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다. 다만 여기선 그 시대가 우리에게 전하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구석기시대 인류는 사냥과 채집으로 생활해 왔다. 이후 신석기시대로 접어들면서 농사를 지으며 가축을 기르게 되었다. 이때부터 정착 생활을 하게 된다. 정착 생활을 하면서부터 심각한 문제가 생기는데, 바로 빈부 격차다. 많은 땅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은 많은 곡식을 모으게 되고, 많은 가축을 기르는 사람은 많은 고기를 얻게 되었다.

이 빈부 차이는 결국 싸움으로 이어지게 되고 자기 걸 지키기 위해 울타리를 세우게 된다. 그리고 서로 빼앗기지 않으려 무리를 지어 생활하게 되고, 이러한 무리를 보호하기 위해 더 큰 울타리가 필요하게 되었다. 물론 그 무리 속에서도 빈부 차이는 존재하지만, 힘이 강하고 많은 곡식을 가진 이가 무리를 이끌었다. 이러한 구조가 발전해 고대 국가를 이루었고, 바로 이 시기에 인류는 청동기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사천 이금동 유적 출토 비파형동검(재가공품)
사천 이금동 유적 출토 비파형동검(재가공품)

사천시에는 초기의 국가형태를 갖추는 이 시기의 유적들이 유독 많다. 향촌 이금동 유적, 서포 구평리 유적, 정동 소곡리 신월 유적, 곤명 본촌리 유적, 용현 송지리 고분군, 정동 예수리 고분군 등이다. 이 중 향촌 이금동 유적과 정동 소곡리 신월 유적에서 살필 때, 청동기 시대와 초기 철기 시대의 사천엔 아주 강력한 집단이 존재했고 그 영향력 또한 매우 컸다.

그 세력의 이야기는 이금동 유적에서 시작된다. 이곳에서는 아주 놀라운 발견이 이루어진다. 그것은 고상 건물의 터이다. 고상 건물은 습기나 짐승으로부터 보호를 위해 기둥 위에 짓는 집을 말한다. 청동기 시대 이후 유적에서 가끔 발견된다. 그러나 이금동에서 발견된 이 고상 건물의 터는 우리나라에서 발견되지 않았던 유적으로 가장 대형이며, 최초이다.

이로써 그 옛날 향촌동에는 아주 큰 세력이 터를 잡고 살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건물지 주변에선 1000여 개의 기둥 구멍이 발견됐다. 이는 아주 거대한 집단이 이 건물 주변에 거주했음을 뜻한다. 나아가 이 집단은 청동기 시대에서 초기 철기 시대까지 세력을 이어갔을 것이다. 마침 이 시기는 늑도가 국제무역항으로 위세를 떨쳤을 때와 같다.

이 시기의 주요 무역품은 철(鐵)이었다. 늑도에서 발견된 중국의 반량전은 이미 철기 시대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면 이 향촌동에 자리한 국가는 어떻게 철을 확보하였을까? 여기서 우리는 정동 소곡리 신월 유적을 떠올리게 된다.

옛부터 철이 많이 났다는 정동 신월마을 ‘쇠실’.
옛부터 철이 많이 났다는 정동 신월마을 ‘쇠실’.

신월 유적은 1969년 홍수로 돌널형식의 무덤 방과 그 위쪽 부분에 깔린 판판한 돌들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알려졌고, 단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했다. 이 신월 유적에서 무덤이 몇 기, 토기 조각이 몇 점 나왔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중요했던 건 거기가 철광산이었음이다.

이 철광산은 이후 조선 시대까지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신월마을엔 지금도 철을 제련한 흔적이 남아 있다. 이로써 볼 때, 향촌에 터를 잡고 늑도를 운영하던 세력은 철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신월 유적을 만든 세력은 향촌 세력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거나 최소한 무역이나 다른 형태로 연대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사천에서 생산된 철은 교역품 중에 중심이 되었다. 나아가 향촌 세력을 강력하게 유지하는 힘의 근원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강력했던 향촌 세력도 시대 흐름을 역행하지는 못한 모양이다. 더 많은 철을 구하고자 했던 무역선들은 철을 찾아 가야로 이동하지 않았을까. 청동기 시대에 거대한 힘을 구축했던 향촌 세력은 결국 가야에 복속되고 말았다.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아 개인적인 생각을 많이 덧붙인 이야기다. 다만 청동기 시대의 사천엔 거대한 세력이 터를 잡고선 세월을 풍미했음을 기억하자. 이 또한 우리의 역사이니 자부심을 갖자.

덧붙이는 말=정동면 신월마을 철광산에 관련하여: 동국여지승람 고적조(古跡條)에는 “사천현(泗川縣)에 관해곡소(觀海谷所)란 이름의 소(所)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곡소는 신라부터 조선 초기까지 있었던 특수한 지방의 하급(下級) 행정구역으로 국가에서 필요한 물자를 생산하던 곳이다. 이 관해곡소에서 철(鐵)을 생산하고 병기(兵器)를 제작한 것으로 짐작된다. 하동군 진교면 고하리의 밭에서 청동제 사전총통(四箭銃筒)과 팔전(八箭)총통 등 모두 107점의 무기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는데, 이들 무기는 모두 사천에서 제작된 것으로 새겨져 있었다.(정동면지에서 발췌해 요약함)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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