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는 사천의 역사와 문화 이야기: 선진리성과 조명군총

왜군의 마지막 요새 ‘선진리성’

패배가 낳은 굴욕의 현장에 서다

일제의 미화 흔적이 그대로···‘씁쓸’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조명군총과 당시 희생자들을 기리는 공간인 선진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조명군총과 당시 희생자들을 기리는 공간인 선진사.

422년 전 정유재란 때 사천에서 일어났던 조·명(조선과 명나라) 연합군과 왜군의 싸움을 법질도 전투 또는 사천성 신채 전투라 부른다. 신채(新寨)가 성(城)의 일본식 표현이므로, 후자는 일본에서 부르는 이름이다. 이 전투에서 희생된 조‧명 군사들의 넋을 위로하는 행사를 사천문화원 주관으로 해마다 10월 30일에 연다. 이 위령제가 얼마 남지 않은 날에 그날의 흔적을 좇아 선진리성(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74호)에 올랐다.

돌계단을 따라 성 위로 올라가면 왜성 형태의 출입문이 나타난다. 성벽도 일본식의 석벽이다. 돌계단에 올라 동쪽을 바라보았다. 기록에는 ‘선진리 신채는 삼면이 바다로 쌓여 있고 동쪽만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고 했으니, 생각해보면 선진리성으로 들어가는 옛 도로 쪽이 정유재란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지금은 주차장으로 변한 지역과 무형문화재 전수관이 있는 곳이 422년 전에는 격전지였음이다. ‘명나라 화포가 정문에서 200보 떨어져 있었다’는 기록을 참고하면 지금의 사천 무형문화재 전수회관 자리쯤에 포대가 위치했을 가능성이 크다.

치열했던 전장의 풍경을 떠올리며 선진리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그곳엔 ‘충령비(忠靈碑’)가 세워져 있는데, 이는 유명을 달리한 공군 용사들을 기리는 ‘비’이다. 그러나 422년이란 시간을 되돌리면, 이곳은 일본식 신채 중에서도 가장 핵심 기능을 했던 ‘천수각(天守閣)’이 있던 곳이다. 또 1918년엔 정유재란 때 이곳에 주둔했던 일본 시마즈 가문의 후손들이 조상을 기리는 ‘석비(石碑)’를 세웠던 곳이기도 하다.

선진리성의 역사가 통일신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고, 임진왜란이나 정유재란 이전에도 성이 존재했음을 고려하면, 이곳은 분명 그 시절에도 아주 중요한 기능을 맡았을 곳이다. 이곳에 ‘천수각’이 들어섰다가 허물어지고, 다시 ‘석비’가 세워졌다가 부서지고, 지금은 공군의 호국영령들을 추모하는 ‘충령비’가 세워졌으니, 역사는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할 수 있겠다.

선진리성의 제일 높은 곳에 세워진 충령비. 한때는 이곳에 왜군의 승전을 기념하는 '석비'가 서기도 했다.
선진리성의 제일 높은 곳에 세워진 충령비. 한때는 이곳에 왜군의 승전을 기념하는 '석비'가 서기도 했다.

‘충령비’에서 서녘 바다를 바라보니 사천만이 한눈에 들어온다. 저곳이 바로 이순신 장군이 승리한 ‘사천 해전’의 현장이다. 난중일기 ‘사천 해전’ 편에는 ‘언덕 위에 있는 적들에게 활과 화포를 쏘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기억하듯 언덕 한 편에는 ‘이충무공 사천 해전 승첩 기념비’가 서 있다. 그러나 선진리성의 주 무대를 왜성으로 복원해 놓은 데다 승첩 기념비도 한쪽으로 비켜 서 있어 뭔가 아쉽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선진리성을 뒤로하고 벚나무가 우거진 좁은 도로를 따라 조명군총으로 향했다. 법질도 전투에서 유명을 달리한 많은 군사들이 묻혀있는 곳이다.

정유재란 당시 중로군(中路軍)의 제독 동일원(董一元)은 2만6800명을 지휘하여 경상우병사 정기룡(鄭起龍)이 이끄는 조선군 2200여 명과 함께 사천성 신채(=현 선진리성)를 공격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도리어 성문을 공격하던 팽신고(=명군의 유격장)의 진중에서 대포 옆에 있던 화약궤에 불이 붙어 폭발하니 아군들이 혼란에 빠지게 되고, 그 순간을 눈치챈 왜군들이 성 밖으로 몰려나와 전투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조·명 연합군은 쏟아져 나오는 왜군들에 무참히 도륙을 당하고 만다. 전투 후 흩어져 있던 시체들을 한곳에 모두 모아 묻은 것이 지금의 ‘조명군총’이다. 누군가의 아들이었으며, 누군가의 아버지였을 많은 군사가 고향을 떠나 왜군과 싸우다가 이곳에 묻힌 것이다. 일본 측 기록에는 3만6000여 명을 죽였다고 나와 있으나 조선실록에는 7~8천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고 했으니, 이 전투의 승자와 패자의 주장이 엇갈린다. 다만 당시 조·명 연합군 전체 숫자가 3만이 못되었다고 하니 일본 측 기록은 부풀렸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벚나무길을 지나 조명군총에 도착하니 일충문(一忠門)이 맞이한다. 경건한 마음으로 일충문을 지나 선진사(船鎭祠)에 들어섰다. 먼 타국에서 유명을 달리한 명나라 군사들과 조국을 지키다 산화한 조선의 군사들에게 참배하기 위함이다.

선진사에서 나와 조명군총 곁에 있는 이총(耳塚)으로 향했다. 사천성 신채 전투를 승리로 이끈 시마즈는 숨진 조‧명 군사들의 코를 베어 궤짝 열 개 나눠 담아 일본으로 향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전공을 인정받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도요토미가 이미 죽은 뒤라 제대로 보상을 받진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며 조선에서 건너간 죽은 자들의 코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그 흔적이 일본 교토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봉안된 도요쿠니 신사(豊國神社) 앞에 있는 코무덤(鼻塚)이 바로 그것이다. 이 무덤은 마땅히 코무덤으로 불리어야 하나, 이름이 야만스럽단 이유로 지금 일본에선 귀무덤(耳塚)으로 바꿔 부르고 있다.

교토에서 이 무덤을 발견한 박삼중 스님이 그 원혼들을 모셔와 ‘사천문화원’과 함께 안장한 것이 조명군총 곁에 있는 이총이다. 그런데 코무덤을 코무덤이라 부르지 않고, 일본에서 지어 부르는 이름을 그대로 쓴 것이 잘한 일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 이총 옆으로는 몇 해 전부터 ‘당병공양탑’이라는 비가 서 있다. 이 비는 일제 강점기 시절에 일본인들이 ‘조명군총’ 앞에 세웠던 것을 해방 뒤에 마을 사람들이 없앤 것이다. 이것이 왜 다시 세상에 나왔는지 의문이다. 그것도 ‘참전유공자 기념탑’과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사천현감 정덕렬 추모비’와 함께 나란히. 참고로 ‘당병공양탑’에서 ‘당병’은 명나라의 군사를 뜻하는 ‘명병’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사천만에서 바라본 선진리성.
사천만에서 바라본 선진리성.

생각해보면 역사, 특히 전쟁의 역사는 승자와 패자에 따라 기억이 다를 수 있다. 한쪽은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이룬 영광의 역사요, 다른 한쪽은 부끄러워 잊고픈 굴욕의 역사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일본이 422년 전 그날의 전투를 ‘3대 대첩’ 중 하나로 자랑스러워한다는 사실은 낯설지 않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그들의 손으로 그들의 승리를 미화한 흔적이 선진리성에 아직도 남아 있음은 씁쓸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봄이면 선진리성 일대를 뒤덮는 화려한 벚꽃도 마찬가지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뉴스사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