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明(자명_스스로 밝다). 10×10. 2020.
自明(자명_스스로 밝다). 10×10. 2020.

간혹 사람들에게 왜 사느냐 묻는다. 젊었을 때는 일상이 도전이고 희열이었다. 그래서 혹자가 이렇게 물어올 때 망설임 없이 대답하곤 했다. “기쁜 일이잖아요 사는 건. 하루하루가 멋지지 않나요? 얼마나 굉장한 일들이 기다린다고요.” 어찌 보면 지금도 여전한 일상이지만 삶의 속도가 느려진 중년이라 그런지 한 번씩 빠져드는 재미없는 헛헛함은 왜 사냐고 묻는 말에 더 이상 선뜻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곳에도 가 보았다. 지천에 화려한 꽃을 보아도 구름이 멋진 하늘을 보아도 더 슬펐다. 이즈음 진주문고 책방주인이 시절인연에 닿아 발걸음을 옮기는 일이 빈번해졌다. 

밝은 형광등 아래 지상의 색깔들이 다 모여 책표지를 장식했다. 어지러운 활자들의 소리 없는 향연이다. 종이 냄새보다 책 속에서 사람 살갗 냄새가 난다. 방금 몸속에서 끄집어낸 식지 않은 심장과 뇌를 상상했다. 저것들은 온통 사람의,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고전은 최고의 전설의 고향이잖아, 책들이 온통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쉼 없이 돌아가는 초콜릿 기계 같아.’ 어른들은 살아온 인생이 소설책 몇 권은 나올 거라 하셨다. 그 소설 같은 인생들을 한곳에 묻어놓은 평화로운 묘지와도 같았다. 책 무덤이 사람 무덤이라는 생각이 스치는 어느 오후 책방의 풍경이다. 

훔쳐보기 키를 눌렀다. 예쁜 여자가 뜨개질 책을 집어 들고 행복하게 웃는다.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성공전략이라는 굵은 글씨가 쓰여 진 책장을 넘기며 눈빛이 빛났다. 머리가 조금 벗겨진 남자의 손에 쥐어있는 얇은 사랑 에세이가 애달파 그의 사랑을 응원했다. 취업을 준비하고 있을 청춘의 시험서와 자격증을 준비하려는 중년의 두꺼운 책 무게를 보면서 그 도전을 응원했다. 

어쩌면 책방주인은 반 점쟁이일 것이라는 생각이 스친다. 손에 쥐어진 책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들킬 것만 같았다. 타로점이나 터키친구가 봐 준 커피점보다 책점이 적중률이 높지 않겠는가. 잡학이 아니고서야 대부분 자신이 간절한 것이거나 간절했던 것을 펼쳐보기 때문이다. 어느 날 김정운 작가의 책을 모두 집어온 적이 있다. ‘에디톨로지 창조는 편집이다’ ‘남자의 물건’ ‘바닷가작업실에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노는 만큼 성공한다’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책이라기보다는 한 남자의 생각을 한 아름 끌어안고서 마냥 행복해했다. 책방 주인은 이런 나를 보고 김정운이라는 남자와 닮은꼴이 많다며 웃으신다.

“진주문고에 가면 점쟁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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