甲(갑). 20×15. 2020.
甲(갑). 20×15. 2020.

노부부의 전쟁은 그 여자에게서 날아온 문자 한 통으로 간단하게 정리가 되어졌다. 선생님은 너무 감사한 분이시고 덕분에 집으로 다시 들어가게 되었고 남편도 조금씩 고치기로 했다고 했다. 

그리고 엄마는 여자가 되어 있었다. 그 여자에게 사 줬던 걸 똑같이 다 사 달라며 아빠에게 앙탈을 부리시곤 한다. 가족 단톡방 사진 속 엄마는 제법 고급 진 초밥 앞에서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어느 날은 손목과 발목에 보석을 두르고 늙은 남편이 찍어주는 카메라 앞에서도 해맑았다. 아껴서 뭐 하냐며 하고 싶은 거 이제는 다 할 거라 했다. “그렇지! 할 수 있는 거 다 하소. 어무이 죽으믄 그 보석들 다 이 딸년 것이니, 그것도 자식 주는 거나 마찬가지라 여기소! 원껏 힘껏 재력껏 휘감으시소.”

속옷 가게 앞을 지나며 젊은 남자마네킹에게 입혀 놓은 화려한 꽃무늬 속옷을 보면서 엄마는 한참을 서 계신다. 장난기가 발동해 히죽히죽 웃으며 놀렸다. “빤스가 늘어나든 구멍이 나든... 바람난 할배가 뭐가 좋다고 그러고 있노예! 누구 좋으라고” 어느새 엄마의 손에는 속옷가게 작은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늙은 여자가 늙은 남자를 더 사랑하는 게 분명하다. 이쯤 되면 엄마가 큰소리치며 갑이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실상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빠는 예전보다 더 당당했고, 사춘기 시절 수줍은 여학생마냥 나의 엄마는 아빠 곁에 바짝 밀착해 있었다. 역시 내 촉이 정확했다. “갑은 아빠였다! 실세는 아빠였어!” 

한바탕 소란에 나는 아빠의 비밀을 지켜준 의리 있는 딸이 되었고, 며느리는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고자질한 의리라고는 없는 사람이 되었다. 효부였던 며느리에게 줄 아파트는 의리 있는 딸에게 점점 기울어지고, 조만간 팔게 될 개인택시에서 나오는 큰 금액에 내가 지분을 가진 양 당당했다. “아부지, 사람은 말이야 의리가 얼마나 중요해 암만. 아빠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백만 원을 몰래 보내 엄마에게는 나쁜 년 될지언정 아부지를 지켰다이~ 아부지 청춘을 억수로 응원한데이~ ”  

요즘 부쩍 딸을 찾으시는 노부부 때문에 쇼핑이나 식당을 자주 가게 되었다. 그러다 아는 사람들을 만나면 부모님을 인사 시켜 드린다. 환하게 웃으면서 내 부모님을 반가워하는 사람들을 보며 노부부는 딸년이 세상 참 잘 살았다 여기셨다.  

“아부지 아닌데예~ 아버지 바람난 거 소문 다 냈다예. 모르는 사람 아무도 없다예. 그래가 저리들 웃으시는기다예~ 아부지 울동네에선 연예인급이시다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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