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는 사천의 역사와 문화 이야기: 사천해전과 이순신

사천에 왜선 나타났다는 보고에 작전 변경

‘먼저 사천만부터 친다’…거북선 2척 투입

거북선이 출전한 첫 해전, ‘승리로 이끌다’

이순신 장군은 1592년 사천 앞바다에 거북선을 처음 출격시켜 왜선 13척을 격파했다. 사진은 하늘에서 본 사천만.
이순신 장군은 1592년 사천 앞바다에 거북선을 처음 출격시켜 왜선 13척을 격파했다. 사진은 하늘에서 본 사천만.

1592년 4월 13일(이하 날짜는 모두 음력 기준) 왜군들이 부산포로 기습 공격하면서 임진왜란은 시작되었다. 불과 18일만인 5월 2일 왜군은 서울을 함락하게 된다. 평양으로 피난 간 선조는 6월 11일 평양을 떠나고 6월 14일 왜군이 평양성을 점령한다. 

파죽지세로 한반도를 관통한 왜군들은 1군(고니시 유키나가)은 평안도, 2군(가토 기요마사) 함경도, 3군(구로다 나가마사) 황해도, 4군(모리 요시나리) 강원도, 5군(후쿠시마 마사노리) 경상도, 6군(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전라도 등으로 각각 흩어져 군정을 실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때 6군은 정암진(5월 24일)에서 곽재우 장군에게 크게 패해 전라도로 진격하지 못했다.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자 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깊숙이 육지로 올라간 왜군들에게 무기와 식량을 보급하기 위해 남해안을 지나 서해로 올라가는 수로를 이용하려 했다. 하지만 불세출의 영웅 이순신 장군으로 인해 이 계획이 무너지고 만다. 5월 4일 전라좌수영군은 1차 출정하여 옥포·합포·적진포 등에서 승리해 왜군들이 서쪽으로 전진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순신 장군은 다시 2차 출정을 준비한다. 이때에는 전라우수영 이억기와 경상우수영 원균과 더불어 출정하고자 “6월 초3일까지 본영 앞바다로 일제히 모여 달려가 구원하자”라며 서신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함께하기 위해 세 척의 판옥선을 이끌고 전라좌수영으로 오던 경상우수사 원균이 5월 27일 급하게 전문을 보내기를, “힘을 모으기 위해 전라좌수영으로 가던 중 왜선들이 이미 곤양·사천까지 도달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노량으로 이동해 있다”고 했다. 

이에 이순신 장군은 약속한 날짜가 6월 3일이지만, 만일 사천까지 도착한 왜군들을 그냥 둔다면 많은 백성이 피해를 볼 것이며, 왜군들이 더 많이 모이게 되면 전투에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고 판단해,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 서신을 보내어 먼저 출정함을 알렸다.

출정하기 전, 이순신 장군은 먼저 군관 전 만호 윤사공에게 전라좌수영을 총괄하도록 하고, 왜군들이 남해를 큰 바다로 돌아오는 것을 방어하기 위하여 전라좌수영의 고문직이던 수군 조방장 정걸 장군에게 거북선(=귀선) 1척과 판옥선 몇 척을 주어 “좌도의 각 진, 각 포에 지휘할 사람이 없으므로 흥양현(=전남 고흥)에 머물며 대비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곤 5월 29일 사천으로 향했다.

2차 출정에 함께한 군사들을 보면 중위장 순천부사 권준, 중부장 광양 현감 어영담, 전부장 방답 첨사 이순신(=충무공 이순신의 부하), 후부장 흥양 현감 배흥립, 좌부장 신호, 우부장 김득광, 좌척후장 녹도 만호 정운, 우척후장 사도 첨사 김완, 좌별도장 우후 이몽구, 우별도장 여도 권관 김인영, 한후장 전 권관 가안책, 급제 송성, 참퇴장 전 첨사 이응화 등이다. 이순신의 군관이던 변존서, 나대용, 송희립, 이봉수, 신영해, 김효성, 이 설, 배응록 등과 귀선 돌격장인 이기남과 이언량도 함께했다. 귀선 돌격장이 두 명인 것은 거북선 2척이 참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3척(거북선이 포함된 숫자인지는 불확실함)을 거느리고 출정하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은 실로 장대했으리라. 하동 선창에 정박해 있던 원균은 노량으로 향하는 이순신을 발견하고는 빠르게 다가가 사천만에 있는 왜선이 13척이라고 알려준다. 이 말을 들은 이순신은 원균의 함선들을 합류시켜 사천만으로 진격한다.

삼천포대교공원에 설치된 거북선 모형.
삼천포대교공원에 설치된 거북선 모형.

사천만에 다다를 때쯤 왜선 한 척이 곤양에서 나와 사천으로 숨어서 들어가려고 하는 것을 발견하자 선봉에 있던 전부장 방답 첨사 이순신과 남해 현령 기효근이 그 배를 나포하였으나 왜군들은 육지로 달아나 버렸다. 울분에 싸인 군사들이 그 배를 태웠다. 사천만으로 진격해 들어가 선진성에 이르니 왜군들이 조선 수군의 위용을 보고 감히 배를 타고 싸우러 나오지 못했다. 마침 물때 또한 썰물이라 판옥선의 움직임이 쉽지 않았다.

이에 장수들을 모아놓고 이순신이 이르기를 “적들이 매우 교활한 태도를 보이므로 우리가 만약 거짓으로 물러나면 적들은 반드시 배를 타고 우리와 싸우려 할 것이니, 이때 우리는 적을 바다 복판으로 끌어내어 합력하여 격멸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이다”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배를 돌려나오니 왜군들이 배를 타고 뒤쫓아왔다. 그러나 왜군들은 큰 바다로 따라 나오지 않고 일정 거리를 두고 멈췄다. 조선 수군 또한 멀리 벗어나지 않고 배를 세웠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바다는 밀물로 바뀌었다. 무거운 판옥선과 거북선이 기동하기에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수심이 깊어지자 이순신은 귀선 2척으로 하여금 돌격을 명한다. 이때 왜군들은 한 번도 보지 못한 전함임에도 처음엔 크게 동요하지 않고 조총의 사정거리인 50m 이내로 돌격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후 조총의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거북선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조총의 탄환은 나무에 박히거나 퉁겨 나가면서 피해를 주지 못했다.

반면 거북선 두 척은 빠르게 전진하며 부딪쳐 공격하거나 적선들 중심에서 사방으로 화포를 쏘아 왜선 두 척을 침몰시켰다. 이렇게 거북선이 왜선을 양쪽으로 갈라놓자 그 틈으로 판옥선들이 들어오면서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장면을 이순신의 장계로 보면 이렇다.

“거북선을 적선이 있는 곳으로 돌진하게 해 먼저 천, 지, 현, 황 등 여러 종류의 총을 쏘게 했다. 산 위와 언덕 밑, 배를 지키는 세 곳의 왜적들도 철환을 비 오듯 쏘아대는데, 간혹 우리나라 사람도 섞여서 쏘았다. 이에 신은 더 분하여 노를 빨리 저어 나아가 바로 그 배를 두들기매, 여러 장수가 일시에 구름같이 모여 철환, 장편전, 피령전, 화전 및 천자, 지자 총통 등을 비바람같이 발사하면서 저마다 힘을 다하니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중상으로 엎어지거나 부축하여 끌고 달아나는 왜적들이 수조차 헤아릴 수 없었으며, 높은 언덕으로 물러가 진을 치고선 감히 나와 싸울 생각을 못 했다.”

이를 볼 때 이순신은 해상에서 시작한 전투를 선진성까지 이어가 왜군을 공격했음을 알 수 있다. 

거북선의 첫 출정지인 사천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은 두 척의 배를 남겨두어 육지에 있던 왜군들이 그 배를 타고 나오기를 기다리며 모자랑포에서 대기했으나 끝내 왜군들은 나오지 않았다. 사천해전에서 근접전을 벌인 이순신은 어깨에 관통상을 입게 되었고, 이후 이순신의 전투 양상은 근접전보다 화포를 이용한 전투로 자리 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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