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맛으로 영혼이 부르다 (4) - 버스 차장의 서글픈 자화상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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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맛으로 영혼이 부르다 (4) - 버스 차장의 서글픈 자화상 ②
  • 송창섭 시인
  • 승인 2020.09.08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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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섭 시인.
송창섭 시인.

입석 차장은 요즘 말로 슈퍼우먼이었습니다. 그녀들은 양팔을 벌려, 버스 바깥까지 미어터져 튀어나온 사람들을 떨어지지 않게 하면서 안쪽으로 밀어 넣습니다. 전력투구하는 것이지요. 운전사 아저씨가 이에 뒤질세라 차를 좌우로 서너 번 흔들어 주면 아비규환의 상황은 종료가 됩니다. 출입문이 닫히고 내부가 정리되면서 홀쭉이가 되어 겨우 자리를 잡습니다. 힘과 기술, 깡다구 삼요소를 두루 갖추어도 그녀들로선 감당하기 버거운 중노동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시적 자아와 고향집 강아지가 겪은 처지의 동질성을 언급한 시입니다.  

고향집에서 살 때 강아지 사다 놓고 / 이름을 보신이라고 지어 주었다 / 한심한 개는 저 죽인다는 것도 모르고 / 보신! 보신! 하고 부르면 / 꼬리를 치며 온갖 재롱을 다 부렸다 / 고향 떠난 지 벌써 칠 년, 난 그 강아지가 / 지금 내 모습 같아 섬찟함을 느끼며 / 내 이름이 근로자라는데 / 죽인다는 소리만 같아 소름이 끼친다. / 보신이가 나의 잔인한 말장난에 / 일 년을 희롱당해 살다가 / 복중에 보신탕집으로 팔려 갔듯이 / 근로자인 나도 유일한 단 하나의 / 노동력을 잃어버리면 / 산업 찌꺼기처럼 골치 아프다는 / 쓰레기 대우 안 받으려나 걱정이 된다. // 난 아무래도 개 같은 인생을 사는 것만 같고 / 정승같이 쓰라는 시대와 현실에 어울리지 않는 / 피 말리는 가난에 허덕이면서도 / 개새끼같이 주는 것만 받아먹고 / 시키고 부르는 대로 쫄쫄 따라 사는, 그러다 죽어가는 / 근로자 보신이가 아닌가 반성이 깊다. - 「보신이」

말하는 이는 근로자로서 당한 피학적 행위를 통해 과거 자신이 저지른 강아지에 대한 가학적 행위를 연상합니다. 가학자의 입장에서는 현상을 즐길 줄은 알아도 고통은 헤아리지 못합니다. 역지사지가 불가하다는 얘기지요. 좋고 편리하고 기쁜 것을 추구하는 삶 곧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욕망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갖고 있습니다. 다만 이기적인 욕망을 얼마만큼 절제하고 억누르느냐 혹은 이타적으로 쓰느냐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지요. 

인류의 크고 작은 잔혹사는 한결같이 작은 단초에서 출발합니다. 권력을 쥔 자의 의지와 판단은 삶의 음양을 바꾸고 삶의 질을 바꾸며, 역사를 은폐하고 위조하는 행위를 떡 주무르듯 합니다. 바꿔 말하면 큰 실수도 없던 것으로, 사소한 일도 크게 부풀려 뻥튀기할 수 있다는 사실이지요. 인류가 불행하고 서민이 핍박받는 것은 권력의 탄생이 사랑과 자비를 바탕으로 베풀려는 자로부터 출발함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 대접을 받고 싶다, 인간으로서 살고 싶다.’는 절규는 단순히 노동자만의 문제가 아니요, 오직 돈만으로 해결할 문제는 더군다나 아닙니다. 

시집 『우리들 소원』이 나온 이후 여러 번 정권이 바뀌었습니다. 냉정하게 자문해 봅니다. 진정 우리들 “살림살이가 좀 나아지셨습니까?, 인권살이는 예전보다 한층 개선되었습니까?” 자신이 하는 일은 무조건 다 옳고, 자신의 언행에 딴지를 걸고 거부하면 이는 진정 용서받지 못할 배신자인가요. 같은 무리들은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똑같은 소리를 내어야 마땅한지 묻습니다.  

그동안 현실에 대한 질타와 자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아지기는커녕 퇴보에 퇴보를, 추락에 추락을 거듭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삶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평생을 뼈 빠지게 일해도 내 집 하나 갖기 힘든 이가 있는 반면에, 불과 며칠 몇 개월 만에 수천만 원 수억 원을 거저 벌어들이는 이가 있으니 이 어찌 공정하며 평등하다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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