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사천, ‘탐방로’로 무지갯빛 도약을 꿈꾸다
② 완도군 청산도

청산도 슬로길 5코스에 있는 범바위 모습. 범이 웅크린 모습을 닮아 범바위라 이름 붙여졌다.
청산도 슬로길 5코스에 있는 범바위 모습. 범이 웅크린 모습을 닮아 범바위라 이름 붙여졌다.

[뉴스사천=고해린·오선미 기자] 사천시와 한려해상국립공원사무소가 올해 신규사업으로 ‘한려해상 일곱빛깔 무지갯빛 탐방로’ 사업을 제안했다. 무지갯빛 탐방로 사업은 삼천포 실안에서부터 저도-마도-신도-늑도-초양도를 거쳐 대방 대교공원을 잇는 사업이다. 사업의 핵심은 육지와 섬, 섬과 섬을 잇는 탐방로 조성이다. 탐방로는 환경을 크게 파괴하지 않으면서 관광객을 불러 모을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렇다고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분명히 아니다. 이에 <뉴스사천>은 타지역 사례를 살펴보고, 탐방로 사업의 가능성을 짚어본다. -편집자

청산도(靑山島)는 이름처럼 사시사철 푸른 섬이다. 사진은 '서편제' 촬영지에서 바라본 도락리 바닷가 모습.
청산도(靑山島)는 이름처럼 사시사철 푸른 섬이다. 사진은 '서편제' 촬영지에서 바라본 도락리 바닷가 모습.

산도 바다도 하늘도 푸른 ‘청산도’

영화 <서편제>로 널리 알려져 있는 청산도(靑山島)를 찾은 건 지난 7월 말이었다. 

청산도는 완도에서 남동쪽으로 20km 남짓 떨어져 있다. 면적은 33.28㎢, 해안선 길이는 42㎞다. 현재 인구는 2300여 명이다. 청산도는 이름처럼 사시사철 푸른 섬이다. 맑고 푸른 바다와 조화를 이룬 풍경 때문에 예로부터 신선들이 산다는 ‘선산(仙山)’, ‘선원(仙源)’이라고도 불렸다. 

섬 한가운데에는 385m의 매봉산과 대봉산, 보적산 등 300m 내외의 산들이 사방에 솟아있다. 청산도는 산지에서 발원해 사방으로 흐르는 작은 하천을 따라 좁은 평야가 발달했다. 섬의 중앙부와 서부 일부 지역에는 비교적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남쪽 해안에는 10~20m의 높은 해안 절벽이 발달했다. 청산도에서는 동백나무, 후박나무, 곰솔 등의 난대림을 볼 수 있다. 청산도는 대모도, 소모도, 여서도, 장도 등 4개의 유인도와 여러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청산도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포함되어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뛰어난 풍광과 함께 청산도에서만 볼 수 있는 초가집, 흙돌집, 돌담길, 구들장 논, 고인돌, 초분(草墳) 등도 볼거리다. 완도에서 청산도는 뱃길로 1시간 정도 걸린다. 

청산도는 2007년 아시아 최초의 슬로우시티로 지정됐다. 섬 곳곳에서 '느림'을 형상화한 조형물을 찾아볼 수 있었다.
청산도는 2007년 아시아 최초의 슬로우시티로 지정됐다. 섬 곳곳에서 '느림'을 형상화한 조형물을 찾아볼 수 있었다.

느리게 걷다 ‘슬로길’

청산도 슬로길은 전체 11개 코스의 17개 길로 이루어져 있다. 슬로길 코스를 다 합치면 마라톤 풀코스에 해당하는 42.195km에 이른다. 연간 30만 명에 이르는 관광객들이 슬로길을 걷기 위해 청산도를 찾는다. 

슬로길은 원래 청산도 주민들이 마을에서 마을로 이동할 때 걷던 길이다. 청산도는 2007년 아시아 최초의 슬로우시티(Slow City)로 지정됐다. 청산도에서는 속도가 지배하는 현실에서 잠깐 벗어나, 느림의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청산도 곳곳에서 느림을 형상화한 쉼표 조형물, 달팽이 조형물 등을 찾아보는 것도 슬로우시티를 즐기는 또 하나의 재미다.

완도군은 2010년 마을 간 이동로를 개발해 전체 11개 코스로 이뤄진 탐방로를 조성했다. 같은 해에 이 길은 문화체육관광부의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에 선정됐다. 2011년에는 국제슬로시티연맹의 세계 슬로길 제1호로 공식 인증을 받았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취소됐지만, 청산도에서는 매년 4월 ‘청산도 슬로걷기 축제’가 열린다. 관광객들은 유채와 청보리의 물결 사이로 느리게 걸으며 청산도를 느껴볼 수 있다. 

청산도 슬로길은 전체 11개 코스의 17개 길로 이루어져 있다. 슬로길 코스를 다 합치면 42.195km에 이른다. 사진은 청산도 슬로길 안내도.
청산도 슬로길은 전체 11개 코스의 17개 길로 이루어져 있다. 슬로길 코스를 다 합치면 42.195km에 이른다. 사진은 청산도 슬로길 안내도.

슬로길은 저마다 이름이 있다. 미항길, 동구정길, 서편제길, 화랑포길, 사랑길, 고인돌길, 낭길, 범바위길, 용길, 구들장길, 다랭이길, 돌담길, 들국화길, 해맞이길, 단풍길, 노을길, 미로길까지. 옛 지명과 특색을 담아 붙여진 길의 이름만 보아도 그 길이 어떤 길인지 대강 짐작해볼 수 있다. 슬로길 전체를 돌아보려면 넉넉잡아 2박 3일에서 3박 4일 정도의 일정이 소요된다. 슬로길 11개 코스는 테마 별로 짜여져 있고, 특징이 뚜렷하다. 이 때문에 관광객들은 취향에 따라 자신에게 맞는 길을 골라서 걸을 수 있다. 코스는 제일 짧은 구간인 1.2km부터 길게는 6.21km까지 있다.   

가볍게 걸으며 사진을 많이 남기고 싶은 관광객들은 슬로길 1코스인 ‘미항길-동구정길-서편제길-화랑포길’을, 청산도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만나고 싶다면 4코스 ‘낭길’과 7코스 ‘돌담길-들국화길’을 걸으면 된다. 또한 등산을 원하는 이들은 2코스 ‘사랑길’과 5코스 ‘범바위길-용길’을 권한다. 시간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11코스 ‘미로길’을 추천한다.  

한 주민이 경운기를 타고 가는 모습이다. 주민들에게서도 느림의 느긋함과 여유가 묻어나는 듯하다.
한 주민이 경운기를 타고 가는 모습이다. 주민들에게서도 느림의 느긋함과 여유가 묻어나는 듯하다.

모든 코스가 저마다 매력이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대표적인 슬로길은 1코스다. 1코스는 영화 <서편제>, 드라마 <봄의왈츠>, <여인의 향기>, <피노키오> 등 다양한 작품에 등장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노란 유채꽃과 푸른 청보리가 어우러지는 봄에 청산도의 정취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다.

청산도 도청항에서 시작해 해안을 따라 도청리, 도락리 언덕길을 오르면 당리가 등장한다. 당리 언덕 초입에 들어서면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 촬영지가 보인다. 이 곳에서 서편제의 주인공인 유봉과 송화, 동호 세 사람이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는 장면이 5분 가량의 롱테이크로 촬영됐다. 지금은 당시 세트장으로 쓰였던 주막이 있고, 돌담길에서 흘러나오는 진도아리랑을 들어볼 수 있다.

당리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도락리 마을 바닷가 풍경. 하트모양으로 박아둔 '개매기'가 보인다.
당리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도락리 마을 바닷가 풍경. 하트모양으로 박아둔 '개매기'가 보인다.

당리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청산도항과 도락리 마을 바닷가 풍경도 일품이다. 하트모양으로 박아둔 나무말뚝인 ‘개매기’도 눈길을 끈다. 서편제 촬영지를 지나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드라마 ‘봄의 왈츠’가 촬영된 세트장과 화랑포 전망대가 이어진다. 파도가 꽃처럼 부서진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화랑포(花浪浦)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도 그림이다.   

슬로길 5코스에 있는 범바위. 범바위는 강한 자기장과 음이온이 발생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다. 
슬로길 5코스에 있는 범바위. 범바위는 강한 자기장과 음이온이 발생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다. 

‘범바위’에서 ‘명품길’까지 

취재 둘째 날, 이른 아침부터 슬로길 5코스에 있는 범바위에 올랐다. 이날 오전에는 범바위에서 시작해 장기미 해변으로 이어지는 ‘명품길’을 걸었다. 명품길은 청산도의 숨은 절경을 볼 수 있다는 현지 주민들의 강력한 추천에 가게 됐다. 

권덕리 마을에서 출발해 종아리까지 무성하게 자라난 풀을 헤치고 20여 분을 올랐다. 곧 범바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범바위는 범이 웅크린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범바위 근처에서는 강한 자기장이 발생해 나침판이 힘을 잃는 등 신비한 현상이 벌어진다. 음이온이 많이 방출된다고도 알려져 많은 이들이 활력을 찾고 소원을 성취하고자 찾아든단다. 

범바위에서 만난 양응열 청산면장.
범바위에서 만난 양응열 청산면장.

“아유~ 어디서 왔소?”

범바위에 올라 청산도의 청정한 기(氣)를 즐기던 중, 구수한 말투의 두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슬로길 안내 조형물을 확인하기 위해 범바위를 찾은 양응열 청산면장과 김광섭 문화관광해설사였다. 마침 두 사람도 명품길로 간다기에 ‘이게 웬 떡이냐’ 싶어 넙죽 동행을 청했다. 누구보다 청산도에 빠삭한 두 사람과 명품길을 걸었다. 함께 걸으며 청산도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양응열 면장은 청산도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이고, 김광섭 해설사는 청산도가 좋아 섬에 눌러앉았단다. 고향도 아닌데 어떤 점에 끌려서 청산도에 살게 됐을까 호기심이 일었다.

김광섭 청산도문화관광해설사.
김광섭 청산도문화관광해설사.

“원래 감성돔 낚시를 연구하는 바다낚시꾼이었어요. 20여 년 전에 청산도를 알게 됐는데, 완도에서 청산도로 배를 타고 들어오는 데 마음이 너무 편안한 거예요. 청산도에 처음 온 날 도락리 포구의 소나무숲에서 한참을 주저 앉아있었어요. 그때부터 다른 섬에는 못 가겠더라고요.”

세월을 낚는 낚시꾼의 발을 청산도가 붙든 셈이다. 

김 해설사의 사연에 이어 양 면장은 청산도의 부흥기 이야기를 잠깐 들려줬다. 

“그러니까 서해안엔 연평도 파시(波市), 남해안엔 청산도 고등어 파시가 유명했어요. 옛날에 사천이나 이런 데서도 청산도로 어장하러 왔어요. 그 당시에 고등어나 생선을 청산도에서 일본으로 바로 수출했고, 그런 시스템이 다 갖춰져 있었어요. 옛날에는 부잔교에 고등어가 막 넘치고 그랬죠. 나 어릴 때는 도청항에 목선이 100척도 넘게 있었다니까요.”

예로부터 청산도는 흑산도, 거문도와 함께 전국 3대 어장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청산도는 1930년대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고등어와 삼치 파시가 열리던 어업 전진기지였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난 여행자에게 시간여행을 시켜주듯, 청산도의 과거부터 현재를 들려줬다. 그와 함께 청산도 슬로길에 대한 자부심도 내비쳤다.

“청산도 슬로길이 대표적인 모델일 거예요. 많은 지자체에서 와서 보고 가기도 했고, 경관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관광객들에게 맞게 잘 조성해 놨어요. 또, 제주 올레길이 유명하잖아요. 제주도 분들이 아름다운데 살다 보니까 눈이 높은데, 청산도에 와서 반하고 간다니까요?”

명품길 산행 도중 반공‧방첩을 위해 세워졌다 뼈대만 남은 안보 시설물에서 숨을 돌렸다.(사진=김광섭 해설사)
명품길 산행 도중 반공‧방첩을 위해 세워졌다 뼈대만 남은 안보 시설물에서 숨을 돌렸다.(사진=김광섭 해설사)

산행 도중, 반공‧방첩을 위해 세워졌다 뼈대만 남은 안보 시설물에서 잠깐 쉬었다. 타는 목을 식혜와 맥주 한 캔으로 달랬다. 잠깐의 틈새에도 김 해설사의 명품길 설명이 이어졌다.    

“슬로길이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옛길이라면, 명품길은 슬로길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길이에요. 명품길은 조금 험하고 가파르지만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죠.”

좁고 아슬아슬한 명품길은 가파르고 험하지만 청산도의 비경을 만날 수 있는 매력적인 길이다.
좁고 아슬아슬한 명품길은 가파르고 험하지만 청산도의 비경을 만날 수 있는 매력적인 길이다.

명품길은 완도군에서 2016년 6월부터 6개월에 걸쳐 조성한 길이다. 권덕리 말탄바위에서 시작해 청계리 장기미해변으로 이어지는 2.5㎞ 구간이다. 좁고 아슬아슬한 벼랑길이지만, 빼어난 풍경을 보면서 걷다보면 바다라는 벗과 함께 걸어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과 가파른 길에 턱 끝까지 숨이 차올랐다. 더 이상 못가겠다 싶던 그때, 보물 같은 풍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명품길에서만 볼 수 있는 청산도의 비경이 펼쳐졌다. 명품길에서 장기미 해변을 바라보고 찍었다.(사진=김광섭 해설사)
명품길에서만 볼 수 있는 청산도의 비경이 펼쳐졌다. 명품길에서 장기미 해변을 바라보고 찍었다.(사진=김광섭 해설사)

탁 트인 벼랑 아래로 이국적인 섬을 연상케 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명품길에서 바라보는 장기미 해변은 길 이름처럼 ‘명품’ 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해변에서 개미처럼 작아 보이는 사람들이 노닐고 있었다. 

푸른 산, 에메랄드빛 바다, 새파란 하늘이 주는 감동에 교과서 속 고려가요 한 구절이 절로 떠올랐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얄리 얄리 얄라성 얄라리 얄라.’

매년 많은 관광객들이 청산도를 찾는다. 청산도에는 걷기 좋은 슬로길과 함께 잠깐 삶의 쉼표를 찍을 수 있는 '느림의 미학'이 있다.
매년 많은 관광객들이 청산도를 찾는다. 청산도에는 걷기 좋은 슬로길과 함께 잠깐 삶의 쉼표를 찍을 수 있는 '느림의 미학'이 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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