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숫자 표현의 색다른 맛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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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숫자 표현의 색다른 맛 (2)
  • 송창섭 시인
  • 승인 2020.08.04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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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섭 시인.
송창섭 시인.

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각 ‘1’과 ‘35’를 가리키는 ‘1:35’는 ‘한 시 삼십오 분’이라 읽는다고 했습니다. 한글끼리 그리고 한자어끼리 어울리게 읽는다면 ‘한 시 서른다섯 분’, ‘일 시 삼십오 분’이 되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어쩐지 어색한 느낌이 들고 의미 전달에 모호성이 드러납니다. ‘서른다섯 분’은 시간이 아닌 사람 수효를 헤아리는 것 같기도 하고, ‘일 시’는 일하는 시간을 말함도 아니고 언뜻 무슨 의미인지 쉬이 와닿지가 않습니다. 한글과 한자어를 섞은 표현이 뭔가 일관되지 않고 통일성도 없어 보이는데 우리의 언어생활을 편리하게 지배하고 있습니다. 특이하고 놀라운 일이지요. 

돈과 관련한 숫자 놀음으로 옮겨가겠습니다. 관공서에서 많이 쓰는 숫자 표기의 사례입니다. ‘300천 원, 50백만 원’. 언뜻 보기에 숫자 개념을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겠는지요. 이를 보는 순간 헷갈리고 당황스럽지는 않은지요. 그렇다면 읽는 것은 어떻게 해야 옳을까요. 이를 ‘삼십만 원, 오천만 원’이라 읽어야 한다면 의문이 듭니다. 표기를 ‘30만 원, 5천만 원’이라 하면 쉬울 텐데 왜 이렇게 혼란스럽게 할까요. ‘300천 원, 50백만 원’ 표기가 옳다면 이를 ‘삼백천 원, 오십백만 원’이라 읽으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30만 원, 3십만 원, 삼십만 원’이라 쓰고 ‘삼십만 원’이라고 읽으면 될 것을, ‘300천 원’이라 쓰니 난해하기 짝이 없습니다.  

큰 숫자를 줄여 나타내기 위해 도표 한 쪽에 ‘(단위: 천 원)’이라 표기한 것도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단위: 만 원)’으로 설정해 놓고 ‘30, 500’이라고 적으면 별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겠지요. 자연스레 ‘삼심만 원, 오백만 원’이라 읽게 되니까요. 

국제적으로 숫자에 쓰는 쉼표는 3단위를 기준으로 표기합니다. ‘이십팔억 구천삼백사십오만 삼천육백사십오’를 숫자로 나타내면 ‘2,893,453,645’가 된다는 얘깁니다. 이와 달리 우리말 숫자는 4단위를 기준으로 끊어서 헤아립니다. ‘일십백천, 만십만백만천만, 억십억백억천억, 조십조백조천조 …….’ 이를 바탕으로 우리 숫자 쓰임에 쉼표를 찍는다면 ‘28,9345,3645’라고 해야 맞습니다. 4단위를 기준으로 끊으니 시각적으로도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겠지요.  

어린 시절 여자아이들이 고무줄뛰기 놀이를 하면서 숫자를 헤아리던 일이 기억납니다. 하나 둘 …… 열 열하나 …… 열아홉 이십 이십일 …… 삼십팔 삼십구 사 사하나 사둘 사셋 …… 사아홉 오 오하나 오둘 …… 오여덟 오아홉 육 …… 육아홉 칠 ……. 
숫자 헤아림이 참 특별나지 않습니까. 열아홉까지 잘 센 다음 스물이 나와야 하는데 그만 이십으로 바뀝니다. 삽십구 다음은 사십인데 ‘사’라고 하여 ‘십’을 잘라 버립니다. 오십, 육십, 칠십, 팔십, 구십도 마찬가집니다. 당연히 붙여야 할 ‘십’을 과감히 떼어 버리고 ‘사, 오, 육, 칠, 팔, 구’로만 읊습니다. 이는 단순히 홑수 ‘4, 5, 6, 7, 8, 9’가 아니고, 앞뒤 정황을 헤아리고는 차례셈씨 곧 서수사로 받아들여 ‘40, 50, 60, 70, 80, 90’으로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41은 ‘사하나’로, 52는 ‘오둘’로, 63은 ‘육셋’으로 불렀으니 그저 어안이 벙벙할 따름입니다.  

우리말 셈법은 한글과 한자어를 적절히 활용하여 의미 전달을 쉽게 하고, 빠른 헤아림을 위해 탄력적으로 생략하는 적극성을 보여 줍니다. 우리말을 쪼거나 새겨서, 이해도를 높이며 다양한 맛을 우려내는 우리 민족의 빼어난 슬기와 창의력이 돋보이는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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