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섭 시인.
송창섭 시인.

언어는 이 시각에도 살아 꿈틀거립니다. 무한한 생명력을 갖고 쉴 새 없이 진화하고 변신합니다. 새로운 사물이 나타나면 새로운 이름이 붙고,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면 그에 걸맞은 낱말이나 어구가 등장합니다. 이는 말글살이가 살아 숨쉬면서 끊임없이 활동하고 생장한다는 증거입니다. 이 같은 바람직한 변화 속에서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표기 또한 한 몫을 합니다. 우리말 숫자와 관련 있는 낯설고 색다른 맛을 우려내는 표현들을 찾아보겠습니다. 

‘323번’이란 글자,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삼백이십삼 번’ 또는 ‘삼백이십세 번’ 또는 ‘삼백스물세 번’이라 읽을 것입니다. 이들은 나타내는 의미가 서로 같을까요 다를까요. 일반적으로 ‘삼백이십삼 번’ 하면 고유 번호로, ‘삼백이십세 번, 삼백스물세 번’ 하면 횟수로 인식을 합니다. 버스에 ‘323’이라고 적혀 있다면 이를 ‘삼백이십삼 번’이라 이르겠지요. 줄넘기를 해서 최종 결과 ‘323’이면 ‘삼백이십세 번, 삼백스물세 번’이라 읊을 것입니다. 곧 ‘삼백이십삼 번’은 차례를 나타내는 서수사의 의미로 쓰고, ‘삼백이십세 번, 삼백스물세 번’은 사물의 수효를 나타내는 기수사의 의미로 쓴다는 말이지요. 

우리말 속 한자어와 토박이말의 미묘한 쓰임의 차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요즘엔 ‘323’을 ‘삼이삼 번’ 또는 ‘삼이삼’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뭉뚱그려서 이를 표현의 창의적인 다양성이라 해도 되겠지요. 말을 섞바꾸면서 뜻의 빛깔을 다르게 나타내는 말글살이의 지혜가 번뜩입니다. 

글자 ‘4년’은 ‘사 년’이라 읽지 ‘네 년’ 또는 ‘네 해’라 읽지는 않습니다. ‘4세’ 역시 마찬가지로 ‘사 세’라 읽지 ‘네 세’라 읽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나이를 ‘4살’이라 적는 이들이 있습니다. 읽기는 ‘사 살’이 아니라 ‘네 살’이라 합니다. ‘4’란 숫자가 한자어와 결합하면 ‘사’로 읽고 한글을 만나면 ‘네’로 읽는 사례입니다. 우리말이 쉽지 않은 요인 중의 하나이지요. 아무튼 ‘4살’이란 표기는 어색합니다. 이를 그냥 ‘네 살’이라 적으면 별 문제는 없어 보이는데요.    

나이 얘기 하나 더할까요. 글자 ‘45세’. 뭐라고 읽어야 할까요. ‘사십오 세’, 그렇습니다. 어떤 이는 이를 ‘마흔다섯 살’로 말하기도 합니다. 있는 그대로 읽은 건 아니지만 나이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큰 무리는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또 한 쪽에서는 ‘사십다섯 살’이라고 말합니다. 연령층이 오륙십 대 이상 되는 분들은 ‘오십한 살, 칠십아홉 살’ 이런 식의 나이 셈법에 강합니다. 이를 마냥 잘못된 표현이라 할 수 있을까요. 말글살이의 습관적 편의성이 낳은 결과를 맞춤법의 잣대로 무조건 틀렸다고 몰아붙인다면 언어는 그만큼 위축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시계 관련 숫자를 한번 볼까요. ‘1:35’. 이를 ‘한 시 삼십오 분’이라 읽었다면 절반만 맞힌 셈입니다. 왜냐하면 또 다른 쓰임새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찾아내려면 조금은 더 섬세하고 신중해야겠지요. 시계를 보고 ‘한 시 삼십오 분’이라 말했다면 이는 시각을 가리키기에 맞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운동을 포함한 어떤 행위를 시작해서 마칠 때까지 걸린 동안을 이렇게 표기했다면 마땅히 ‘한 시간 삼십오 분’이라 읽어야 옳습니다. 이는 시간의 양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열차나 버스의 출발이나 도착을 알리는 숫자는 시간표가 아니라 시각표라 해야 정확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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